8월 2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골목에 박서보미술관 서울이 문을 연다.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까지 다섯 개 층, 설계는 쌈지길과 대구간송미술관을 그린 최문규다. 이 미술관이 서 있는 바탕은 박서보(1931-2023)가 재단에 기증한 작품 3,000점. 그런데 3,000점에 시장가를 곱하는 계산은 성립하지 않고,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 미술관이 존재하는 이유에 가깝다.
1.문을 여는 날은 8월 21일, 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24길이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이고 12월 31일까지 걸린다. 흐엉 도딘(Huong Dodinh)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로, 박서보와 생전에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첫 전시를 2인전으로 짠 것부터가 이 미술관을 개인 기념관으로만 두지 않겠다는 예고.
2.기증받은 쪽은 박서보재단. 2019년 기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2023년 3월에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이사장은 차남 박승호. 미술관이 앉는 자리도 재단이 이미 뿌리내린 동네, 재단 건물에서 걸어 닿는 거리다.

3.설계자 최문규는 인사동 쌈지길,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대구간송미술관을 그린 사람. 셋 다 길과 건물의 경계를 흐리는 쪽으로 풀어낸 작업. 이번에도 본인은 "건축이 우선이 되기보다 미술 작품을 오롯이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목표로 했다고 말한다. 자재는 자연 재료가 기본.


4.그림이 걸리는 층은 셋. 지하 2층은 정원을 낀 전시장, 2층은 햇빛을 완전히 막은 블랙박스, 3층은 한 변이 8m인 정육면체다. 3층 벽에는 유글라스를 썼고 그 너머로 안산과 도시가 윤곽만 남아 번진다. 지하에서 빛을 들이고 2층에서 빛을 끊었다가 3층에서 도시를 흐리게 되돌려주는 순서인데, 단색 회화처럼 표면만 남은 그림에는 빛의 양이 곧 작품의 조건이다.
다섯 개 층, 전시는 세 개 층
5.골목 쪽에서는 건물을 4~5m 물렸다. 그만큼이 보행 통로. 박승호는 "동네 목욕탕이나 로마 시대 광장처럼 누구나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을 말했는데, 좁은 주택가에서 앞마당을 내주는 결정은 지을 수 있는 면적을 스스로 깎는 선택이다. 그 손해를 감수한 자리에 사람이 선다.
6.박서보의 경매 최고가는 2023년 10월 소더비 홍콩에서 나왔다. 〈Ecriture No.37-75-76〉이 260만 달러, 우리 돈 약 35억 원. 국내 최고가는 2021년 10월 서울옥션의 200호 연필 묘법, 12억 원. 2015년 단색화 열풍 때 100호가 4억 선에 거래됐으니, 10년 사이 이 작가의 그림은 시장에서 층이 다른 물건이 됐다.

7.그러면 3,000점은 얼마인가. 이 곱셈은 성립하지 않는다. 3,000점에는 드로잉과 판화, 소품이 섞여 있어 낙찰 기록이 나온 대형 회화와 값이 같을 수 없다.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만한 물량을 시장에 내놓는 순간 값이 무너진다.

8.무너지는 방식은 한 번 드러난 적이 있다. 2023년 10월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박서보 6점이 올랐고 같은 달 서울옥션 경매에는 7점이 나왔다. 두 회사가 같은 작가를 놓고 정면으로 붙었고, 유족과 소장자와 화랑이 한 창구로 몰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시장이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박서보 낙찰가가 올라온 자리
9.그러니 기증이 하는 일은 소유권을 옮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3,000점을 재단 소장품으로 묶으면 그 물량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밖에 남은 작품의 희소성은 유지된다. 유족이 세금을 마련하려 그림을 급히 내놓아야 하는 압박도 줄어든다. 미술관은 그림을 보여 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값을 지키는 둑이다.
10.그럼 미술관 운영비는 어디서 나오나. 표를 팔아서는 안 나온다. 서울의 사립 미술관 입장료를 1만 원으로 잡고 하루 200명이 든다고 쳐도 한 달 6,000만 원이 못 된다. 학예 인력과 보험료, 사철 돌려야 하는 항온항습 전기료를 대기에는 모자란 액수.
11.답은 재단 건물 쪽에 있다. 연희동의 박서보재단 건물은 대지 773㎡에 연면적 1,997㎡, 지하 2층·지상 4층이고 설계는 조병수. 외피는 타공한 알루미늄이고 구멍 크기가 자리마다 다르다. 안에는 상업 공간과 사무실, 여러 세대의 주거가 함께 들어 있고, 수요일 오후 2시에 예약제로 무료 개방한다고 안내한다. 미술관은 이 건물이 벌어 온 것을 쓰는 층이다.

12.개인 미술관은 거의 이 골격으로 선다. 그림을 거는 층은 돈을 벌지 않고, 같은 필지나 옆 건물의 임대·상업 공간이 그 층을 먹인다. 그림 자체가 자산이라 팔지 않는 편이 이익이니 매출을 낼 이유도 약하다. 관람료를 낮게 두거나 아예 받지 않는 사립 미술관이 흔한 것은 인심이 후해서가 아니다.
13.여기서 한 가지 헷갈리는 게 있다. 박서보의 이름을 쓰는 재단은 둘이다. 1994년 세워진 서보미술문화재단은 마포구 성산동의 옛 작업실을 서보미술문화공간 서울로 고쳐 열었고, 2024년 7월에는 제주 저지리예술인마을에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를 냈다. 이번 연희동 미술관은 2019년 세워진 박서보재단 쪽.

14.제주에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2023년 3월 서귀포 JW메리어트 제주 부지에서 박서보미술관이 첫 삽을 떴다. 대지 12,137㎡에 연면적 11,571㎡, 그 가운데 전시장은 900㎡. 설계는 폴란드 CKK 조단키 콘서트홀로 알려진 Fernando Menis, 목표는 2024년 여름 개관이었다. 같은 시기 고향 예천의 미술관 계획은 포기 상태라고 지역 언론이 전했다. 연희동에 다섯 개 층이 먼저 완성된 배경에는 이 두 건의 사정이 깔려 있다.


15.연희동 골목에 다섯 개 층짜리 미술관이 서고, 그 안에 걸리는 것은 한 작가가 남긴 3,000점 가운데 일부다. 나머지는 전시되지 않은 채 재단에 묶여 밖에 남은 그림의 값을 지킨다. 국내에서 같은 걸 하려 할 때 먼저 걸리는 건 수장고다. 그림을 걸 벽은 어렵지 않게 만들지만 온습도를 사철 일정하게 잡는 방은 평당 공사비가 전시장을 웃돌고, 준공 뒤에도 전기를 계속 먹는다. 보여 주는 비용보다 안 보여 주는 비용이 더 드는 시설을 짓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