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뒷골목의 카페가 재개발에 밀려 자리를 줄였다. 주인은 서울을 돌며 건물 40여 곳을 보고 경동시장 뒤 옛 여인숙을 골랐고, 다 고치기 전에 문부터 열었다.
1.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 뒤편 골목, 붉은 벽돌 3층 건물에 올해 7월 커피한약방 청량리점이 문을 열었다. 원래 방이 50칸 있던 여인숙. 커피는 손으로 내리는 필터커피가 중심이고, 디저트는 같은 주인이 꾸리는 디저트집 혜민당이 맡는다. 지금은 60%쯤 완성됐다는 게 주인 강윤석 대표의 말.
2.이사 온 가게다. 본점은 2013년 무렵 을지로3가 뒷골목,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 혜민서(惠民署)가 있던 자리에 열었고 몇 년 뒤 맞은편에 혜민당을 냈다. 일대가 재개발에 들면서 혜민당 건물을 올해 3월 말까지 비워 달라는 통보를 받았고, 을지로점은 지금 규모를 줄여 영업한다. 강 대표가 그 뒤 사대문 안팎을 돌며 40~50곳을 보고 골라낸 게 이 건물.


3.문을 열면 둥근 아치 아래로 약재 서랍장이 벽 하나를 채우고, 계산대 앞판은 자개로 덮였다. 커피를 볶는 곳은 1층 안쪽의 따로 떨어진 방. 2층에는 자개 병풍과 어항, 송나라 때 것이라는 나무 탁자를 들였고 복도에는 여인숙 시절 방문이 그대로 남았다. 강 대표가 잡은 실내의 큰 방향은 사보이 호텔.

4.방 50칸을 나누던 칸막이벽은 대부분 걷어냈고, 대표는 그 철거가 꽤 힘들었다고 했다. 대신 남긴 건 창과 바닥과 천장이다. 마름모 창살에 분홍과 연두 유리를 끼운 동양식 색유리 창, 기하학 무늬 대리석 바닥, 샹들리에. 건물을 언제 지었는지는 공개된 자료가 없다.

5.붉은 옻칠 계산대 위에 구리 드리퍼가 한 줄로 서고, 직원이 구리 주전자로 물을 가늘게 돌려 붓는다. 이름은 한약 달이듯 한 방울씩 내린다는 뜻에서 왔다. 한 잔에 몇 분이 걸리는 커피라 손님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그 시간에 눈이 머무는 곳이 서랍장과 자개와 색유리다. 회전이 느린 메뉴를 공간이 받쳐 주는 구조. 빨리 마시고 나갈 손님을 받으려고 만든 가게가 아니다.


6.이 집에 손님이 드는 첫째 이유는 서울에서 점점 사라지는 실내를 갖고 있어서다. 을지로 혜민당은 오전 손님의 상당수가 외국인이었고, 전체로는 약 30%였다(비즈한국, 2026년 3월). 재개발이 헐어 내는 게 바로 이런 건물이니, 남은 낡은 건물에 들어간 가게일수록 귀해진다. 을지로를 떠나며 강 대표가 아쉬워한 것도 그 점. K-컬처가 주목받는 시기에 한국을 보여 줄 공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7.둘째는 남이 돈으로 사기 어려운 실내라는 점이다. 강 대표는 뮤지컬 배우로 일했고, 목수이기도 해 극단 '목수'를 만들었으며, 을지로점의 인테리어와 시공을 직접 했다. 가구와 소품과 음악마다 메시지를 넣었다는 게 본인 설명이고, 을지로점은 10년 동안 매일 고치고 채운 결과다. 같은 분위기를 업체에 주문하면 견적서가 나오지만, 같은 세월은 주문이 안 된다.

8.가격은 을지로 본점 메뉴를 기준으로 아메리카노 4,500원, 카페라테 5,500원, 과일 주스 같은 계절 음료 7,000원이다. 청량리점 가격표는 아직 공개된 자료가 없다. 을지로 기준으로 보면 커피값은 스타벅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와 거의 같고, 손님 한 사람의 계산서를 키우는 건 옆에 붙는 혜민당 디저트다.
9.돈이 가장 많이 드는 쪽은 공사다. 건물 면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방 한 칸을 2평으로만 잡아도 옛 객실 자리가 330㎡ 안팎. 카페 인테리어를 업체에 맡기면 평당 200만~300만 원을 부르는 게 보통이니(추정), 칸막이를 헐고 3개 층을 손보는 일을 그 단가로 다 사면 공사비는 억 단위로 쌓인다. 강 대표는 그 상당 부분을 손으로 메운다.

10.60%에서 문을 연 것은 돈의 순서를 바꾼 결정이다. 다 고친 뒤에 열면 공사비를 먼저 다 쓰고 매출은 그 뒤에 온다. 덜 고친 채 열면 1·2층에서 들어오는 매출로 나머지 공사를 이어 간다. 3층 일부는 작가 작품을 거는 전시 공간으로 쓸 계획이라고 한다. 을지로점이 10년을 채운 방식도 이것.
11.공개된 손님 수는 없다. 손님 한 사람이 커피와 디저트로 1만 원을 쓰고 하루 300명이 든다고 치면 한 달 매출은 9,000만 원쯤 된다(가정). 매장 밖으로 나가는 상품도 있다. 원두와 드립백. 종이에 싸고 노끈으로 묶어 파는데, 손님이 집에 가져가는 이 포장이 가게 이름을 경동시장 밖으로 실어 나른다.

12.같은 시장에 먼저 온 사례가 하나. 경동시장 본관에서는 2022년 12월 스타벅스가 28년 동안 비어 있던 경동극장을 고쳐 매장을 열었다. 이름은 경동1960점이고, 팔리는 품목마다 300원을 시장 상생 기금으로 쌓는다. 낡은 건물의 분위기를 팔아 시장에 사람을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두 가게가 같은 일을 한다.
커피한약방이 청량리에 오기까지
13.을지로를 밀어낸 개발은 청량리에도 와 있다. 청량리역 앞에는 2023년 7월 최고 65층, 1,425세대짜리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가 입주했다. 새 단지 주민은 시장 뒷골목 카페의 새 손님이 되지만, 그 단지를 세운 같은 힘이 언젠가 뒷골목의 낡은 건물들에도 닿는다. 을지로에서 겪은 일이 여기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14.재개발로 자리를 줄인 을지로의 카페가 경동시장 뒤 옛 여인숙에 새 가게를 열었고, 방 50칸의 벽을 헌 건물을 60%만 고친 채 영업하며 나머지를 매출로 채워 간다. 국내에서 낡은 숙박 건물을 카페로 돌리려면 건물 용도를 숙박시설에서 근린생활시설로 바꾸는 절차가 먼저 걸리고, 그때 주차와 정화조 기준을 새 용도에 맞춰야 하는 경우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