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우영미가 이태원 플래그십의 맨 아래층을 알랭 뒤카스에게 내줬다. 문을 연 지 넉 달. 메뉴판에는 코스가 없고, 접시마다 1만 4,000원에서 4만 2,000원 사이의 가격이 붙어 있다.
1.2026년 5월 20일, 서울 이태원로27길의 우영미(WOOYOUNGMI) 플래그십 지하에 사피드 서울(Sapid Seoul)이 문을 열었다. 미쉐린 별을 가장 많이 모은 셰프로 꼽히는 알랭 뒤카스(Alain Ducasse)가 한국에 낸 첫 식당. 건물은 일곱 달 가까이 먼저 열렸고, 그때 안내된 식당 개점 시기는 연말.
2.건물은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대지는 150평. 설계는 스위스의 Stocker Lee Architetti. 둥글게 굽은 외벽을 콘크리트와 유리블록으로 두르고, 안은 층과 층이 반 층씩 엇갈려 이어지는 스킵 플로어로 짰다. 지상에는 남성복과 여성복 매장, 4층에는 Café de Wooyoungmi, 옥상에는 정원. 식당은 그 맨 아래에 놓였다.


3.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면 천장부터 보인다. 우영미가 민화를 다시 그린 무늬를 천에 옮겨 홀 천장을 통째로 덮었고, 그 아래 벽에는 뒤카스가 제안한 식물 표본 수채화가 액자에 담겨 열을 지어 걸렸다. 조명은 1970년대 무라노 유리 빈티지. 직원 유니폼도 우영미가 디자인했다.


4.바 좌석에 앉으면 요리사들이 접시를 올리는 손이 유리 너머로 그대로 보인다. 나머지 자리는 2인 테이블과 긴 공용 테이블. 좌석 수는 공개되지 않았고, 공개된 사진으로 세어 보면 40석 안팎(추정).

5.메뉴는 채소와 곡물, 해산물이 앞에 서고 고기는 곁에 붙는다. 버터와 크림, 설탕과 소금을 덜어 내는 뒤카스의 나튀랄리테(Naturalité) 원칙. 개점 전에 공개된 메인은 수란을 올린 그린 아스파라거스였는데, 포크로 수란을 가르면 노른자가 아스파라거스 위로 번지며 소스 노릇을 한다. 버터 소스가 하던 일을 달걀 하나에 맡긴 접시.

6.재료는 80% 이상을 국내 농가와 작은 생산자에게서 받는다. 개점 아흐레 뒤 한 칼럼니스트가 받은 접시는 스트라치아텔라를 얹은 구운 버터넛 스쿼시, 그린빈과 전복, 비트를 넣은 문어 버거, 셀러리악과 머스터드를 곁들인 관자였다. 디저트는 바닐라와 두유 크림을 채운 에클레어에 볶은 퀴노아 프랄린을 뿌렸다. 생크림 자리에 두유가, 견과 자리에 곡물이 들어간 디저트 한 개에 메뉴판 전체의 원칙이 다 들어 있다.


7.코스가 없다. 메뉴판은 스타터와 메인, 디저트로 나뉘고 손님이 접시를 골라 한 끼를 짠다. 접시 가격은 1만 4,000원에서 4만 2,000원 사이이고, 버섯과 햄프 두부, 헤이즐넛으로 낸 국물 요리가 2만 6,000원. 별을 단 셰프 이름을 걸고 서울에서 이 가격대 단품을 내는 식당은 흔치 않다.
8.2022년 가을, 청담동 루이 비통(Louis Vuitton) 건물에 문을 연 알랭 파사르(Alain Passard)의 팝업은 저녁 한 끼가 30만 원이었고 예약은 5분 만에 찼다. 채소를 앞세운 프렌치, 패션 하우스 건물이라는 조건까지 같다. 갈린 건 기간. 파사르는 정해진 기간을 채우고 떠났고, 사피드는 이 건물의 한 층으로 상설 입주했다.
9.상설 식당은 한 번 오고 마는 손님으로 버티지 못한다. 팝업이 하룻저녁 행사라면 상설 층은 같은 사람이 한 달에 두세 번 내려와야 계산이 맞고, 사피드의 가격표는 그 계산에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옷을 사러 온 사람은 반 층씩 계단을 내려가다 끝에서 점심을 먹고, 위로는 4층 카페와 옥상 정원이 반대쪽 끝을 잡는다. 건물 양 끝에 먹고 쉬는 자리를 두면 손님은 그 사이 매장 층을 두 번 지난다.

10.한 사람이 스타터 하나와 메인 하나를 고르고 음료를 더하면 7만 원 안팎(추정). 좌석 40개에 점심과 저녁을 합쳐 하루 56명이 앉는다고 잡았다. 점심이 저녁보다 잘 차는 쪽에 걸었는데, 매장이 문을 여는 시간에 사람이 몰리는 건물이라서다.
11.매일 문을 연다고 치면 한 달 매출은 1억 1,700만 원쯤 된다. 국산 재료 비중이 높고 손질이 많은 채소 요리라 식재료 원가율을 32%로 잡았다. 요리사와 홀 직원 14명의 인건비는 식재료비보다 크다. 단품 식당은 주문이 제각각 들어와 코스 식당보다 주방에 손이 더 필요하기 때문.
12.이 표에서 가장 불확실한 줄은 임대료. 건물이 회사 소유인지 임차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같은 회사 매장의 지하층을 식당 손익에 얼마로 매길지는 회사가 정하기 나름이다. 뒤카스 쪽에 내는 이름값도 알려지지 않았다. 표의 남는 몫 1,800만 원은 그 로열티를 빼기 전 금액.
13.혼자 서는 가게로만 재면 이 식당의 계산은 빠듯하다. 우영미와 솔리드 옴므(Solid Homme)를 운영하는 쏠리드의 2022년 매출은 998억 원이었다. 그 규모의 패션 회사에 지하 식당은 매출 한 줄보다, 이 브랜드가 무엇을 먹고 어떤 접시를 고르는지 보여 주는 층에 가깝다. 손님이 내려와 앉아 있는 시간이 길수록 위층 옷걸이 앞을 지나는 횟수도 는다.
14.사피드라는 이름은 파리에서 먼저 나왔다. 2021년 10월 뒤카스가 로맹 메데르(Romain Meder)와 함께 파라디 거리(rue de Paradis)에 연 첫 사피드는, 입구 단말기로 주문하고 학교 식당 같은 긴 의자에 나란히 앉는 채식 식당이었다. 생선은 양념처럼 조금만 썼다.
15.서울의 사피드는 그 이름과 원칙만 가져왔다. 단말기 대신 직원이 주문을 받고, 긴 의자 대신 민화 천장 아래 테이블에 앉는다. 뒤카스는 원칙만 들고 가서 도시마다 다른 식당을 차리는 이 방식을 노마드 퀴진(Nomad Cuisine)이라 부른다. 이름이 큰 만큼 기대를 다 채우지는 못했다는 게 앞의 그 칼럼니스트의 평.
16.패션 회사가 플래그십의 맨 아래층을 셰프 브랜드에 내주면서 팝업 대신 상설을, 코스 대신 단품을 골랐다. 가장 비싼 접시가 4만 2,000원으로, 청담동 팝업이 받던 저녁값의 7분의 1. 국내에서 이런 단품 식당을 점심부터 저녁까지 매일 열면 주 52시간 상한에 먼저 걸린다. 주방을 두 조로 나눠 돌려야 해서 인건비가 매출보다 먼저 불어나는 구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