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역에서 언덕을 하나 오르면 호텔 1층에 벽돌로 넉 자를 붙여 놓은 가게가 나온다. 「ㄹㄹㅋㅍ」. 원두는 파나마 한 나라에서만 들여와 100종 넘게 걸어 두고, 한 잔에 9만 원을 받는 경매 낙찰 로트가 그 목록 안에 섞여 있다. 같은 건물 옆 창구에서는 아메리카노를 4,900원에 판다. 문을 연 지 1년 5개월 만인 지난 2월, 이 집이 세계 100대 커피숍 51위에 이름을 올렸다.
1.상호는 루리커피(RULI COFFEE). 자리는 서울 중구 퇴계로20길 31, 2018년에 문을 연 더 큐브 호텔(THE CUBE HOTEL) 1층이고 명동역 3번 출구에서 걸어 5분쯤 걸린다. 개점은 2024년 9월. 영업은 오전 11시 30분에 열어 오후 6시 30분에 닫고, 수요일은 휴무. 자리도 대로변이 아니라 언덕을 한 번 꺾어 올라간 이면도로다.
2.차린 사람은 박병욱 대표다. 본업은 커피가 아니라 커뮤니티. 2000년에 시작한 게임·서브컬처 커뮤니티 루리웹(RULIWEB)을 운영하고, 그 안에서 버추얼 유튜버 사업 라이브루리(LiveRuli)를 함께 굴린다. 루리웹의 월 방문은 6,300만 회쯤으로 집계된다. 국내 게임 커뮤니티 가운데 가장 큰 규모. 손님 명단을 이미 손에 쥔 사람이 카페를 열었다는 이야기.

3.콘크리트 캐노피 위에 벽돌을 잘라 붙여 넉 자를 세웠다. 「ㄹㄹㅋㅍ」. 상호의 초성만 남긴 표기이고, 커뮤니티에서 오래 쓰여 온 줄임 방식이기도 하다. 유리문 오른쪽 벽면 전체는 메이드 복장을 한 고양이 귀 캐릭터 일러스트로 덮여 있다. 안쪽 벽에는 호두나무 명판이 걸렸는데 거기에도 초성이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파란 리본 모양 인증 스티커가 붙었다.

4.공간은 크게 둘로 갈린다. 한쪽은 유리문 안으로 가챠 기계가 줄지어 선 굿즈 구역과 테이크아웃 창구, 다른 한쪽이 오크 상판을 두른 드립 카운터다. 카운터 좌석은 여덟. 벽 선반에는 부르고뉴 잔이 줄로 매달려 있고 그 아래 냉장 진열장에 위스키 몇 병이 서 있다. 바 안쪽으로는 그라인더 두 대와 스테인리스 배수 트레이, 검은 드립 스탠드.

5.추출은 도자기 멜리타(Melitta) 드리퍼에 원두 8g으로 시작한다. 물을 네 번 나눠 붓고 첫 물에는 황동 칠링볼을 함께 걸친다. 향이 날아가기 전에 온도를 떨어뜨리려는 장치. 다 내린 커피는 잔이 아니라 부르고뉴 와인글라스에 담겨 나오고, 8g으로 뽑은 양이라 볼 바닥을 얇게 덮는 데서 그친다. 잔을 흔들면 그 좁은 면적에서 향이 위로 모인다.

6.게이샤 워시드에 붙는 컵노트는 보통 자스민과 베르가못 쪽. 내추럴로 말린 것은 잘 익은 열대 과일과 발효된 단맛으로 간다. 8g만 쓰면 농도는 옅어지지만 향의 윤곽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마셔 보지 않고 특정 잔의 맛을 옮길 수는 없다. 다만 이 집이 왜 손잡이 달린 잔을 버리고 와인글라스를 골랐는지는 추출량만 봐도 설명이 된다.

7.커피 목록은 회색 패브릭 바인더 한 권. 펼치면 농장별로 장이 나뉜다.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Hacienda La Esmeralda)가 한 장, 파나마 서부 레나시미엔토의 핀카 누구오(Finca Nuguo)가 한 장, 워시드와 내추럴을 가른 게이샤 목록이 또 한 장. 마지막 장은 통째로 경매 낙찰분이고 거기 스무 종이 들어간다. 모두 8g 단위로 표기되며 값은 10,000원에서 90,000원 사이에 놓인다.

8.바인더 맨 아래 두 줄에는 「랜덤 파나마 커피 15,000」과 「오늘의 파나마 커피 10,000」이 있다. 고르기 어려운 손님을 위해 뽑기로 정해 주는 항목. 굿즈 구역에 세워 둔 가챠 기계와 같은 방식을 커피 목록에 그대로 옮겼다. 카운터 위에는 여행 가방을 열어 놓고 그 안에 낙찰 로트의 진품 인증서를 펼쳐 세워 둔다.

9.아메리카노가 4,900원, 라테가 6,900원, 초코라테 5,500원. 그 옆 바인더에서 가장 비싼 줄이 90,000원. 같은 가게 안에서 음료 하나의 값이 18배까지 벌어진다. 스페셜 로트 구간이 15,000원, 나노 로트가 40,000원, 그 위가 경매 낙찰분. 계단이 촘촘하게 놓여 있어서 손님이 자기 예산에서 멈출 자리를 고를 수 있다.

10.값을 이렇게 잘게 쪼갤 수 있는 건 한 잔에 8g만 쓰기 때문이다. 국내 핸드드립은 보통 15g에서 20g을 쓰고, 절반만 쓰면 같은 생두로 잔 수가 두 배 나온다. 지난해 베스트 오브 파나마(Best of Panama) 경매의 최고가 로트는 kg당 30,204달러에 팔렸다. 8g으로 끊어도 원두값만 32만 원이 넘으니, 90,000원짜리 줄이 그 등급일 수는 없다.
11.그렇다고 비싼 줄이 매출을 만들지는 않는다. 카운터가 여덟 자리인데 한 잔 내리고 설명하는 데 15분쯤 걸리니, 하루에 나가는 드립은 30잔 안팎에서 멈춘다. 그동안 테이크아웃 창구는 그 두세 배 잔 수를 4,900원에 판다. 값이 18배 벌어진 두 라인이 하루를 마치면 매출에서 엇비슷해진다.
12.비싼 줄이 하는 일은 따로 있다. 그 목록이 이 집을 세계 100대 커피숍 명단에 올렸다. 지난 2월 커피 페스트 마드리드(Coffee Fest Madrid)에서 발표된 2026년 순위에서 51위, 한국에서 이름을 올린 곳은 부산의 모모스커피와 여기 둘뿐이었다. 순위는 투표로 정해지고, 표는 사람이 던진다. 월 방문이 6,300만 회인 커뮤니티를 쥔 사람에게 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아니다.

13.분홍색으로 칠한 테이크아웃 창구 앞에는 배너가 하나 서 있고, 거기 큰 글씨로 「*NOT A.I」라고 적혀 있다. 화면 속 캐릭터가 주문을 받지만 그걸 움직이는 건 실시간의 사람이라는 고지. 그 응대 장면은 그대로 방송으로 나가고, 시청자 채팅이 매장 모니터에 함께 뜬다. 인건비를 줄인 게 아니라 한 사람의 근무시간을 접객과 방송 두 군데서 회수하는 방식.

14.희귀 로트를 잔술로 파는 형식 자체는 새롭지 않다. 도쿄·홍콩·서울에서 이미 여러 해 돌아간 방식이고, 이 지면에서도 여러 번 다뤘다. 다른 건 순서. 보통은 카페가 먼저 서고 팬이 나중에 붙는데, 여기서는 26년 된 커뮤니티가 먼저 있었고 카페가 그 뒤에 지어졌다. 명동인데도 대로변을 사지 않고 언덕 뒤 호텔 1층을 고른 배짱이 거기서 나온다.
15.커뮤니티 하나가 카페를 세워 1년 5개월 만에 세계 순위표에 들어갔다. 값이 18배 벌어진 두 라인을 한 지붕에서 굴리며 비싼 쪽이 이름을 벌고 싼 쪽이 현금을 번다. 국내에서 이걸 흉내 내려 할 때 먼저 걸리는 건 원두도 인테리어도 아니라 표를 던져 줄 사람이 있느냐다. 커피 실력으로 순위에 드는 길과 명단을 쥐고 시작하는 길은 준비물이 아예 다르고, 뒤쪽은 하루아침에 살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