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니트 브랜드가 첫 해외 매장을 도산공원에 냈다. 664.3제곱미터, 다섯 층. 그런데 물건이 걸린 층은 둘뿐이다. 이 회사가 미국에 가진 매장은 전부 부촌 소도시의 작은 부티크이고, 맨해튼에는 한 곳도 없다.
1.지난 7월 1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42길 26에 브로슈 워커(Brochu Walker)의 '메종 서울'이 문을 열었다. 664.3제곱미터, 약 201평, 다섯 층. 회사가 메종이라는 이름을 붙여 낸 첫 매장이자 첫 해외 매장이기도 하다. 사흘 앞선 15일 저녁 초대 행사에는 첫 한국 앰버서더로 뽑힌 배우 차주영과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Danny Koo)가 왔다.
2.다섯 층인데 물건을 파는 층은 둘. 나머지는 프라이빗 VIP 스위트와 스타일링·피팅으로 갔다. 회사는 200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했고, 2013년 카린 두브너(Karine Dubner)가 사들여 지금의 캐시미어 니트 브랜드로 다시 짰다.
3.미국 매장은 다섯 곳. 캘리포니아 카멜(Carmel)과 몬테시토(Montecito), 코네티컷 웨스트포트(Westport), 뉴욕 사우샘프턴(Southampton), 애틀랜타 벅헤드 빌리지(Buckhead Village)에 있다. 전부 부촌 소도시이고, 맨해튼에도 로스앤젤레스 시내에도 한 곳이 없다. 손님이 여름을 나는 곳을 따라다니던 회사가 첫 대도시 매장을 서울에 낸 것.

4.공간은 서울의 블러커 디자인 스튜디오(Blurker Design Studio)가 두브너와 함께 짰다. 파사드의 스투코는 기성 제품을 쓰지 않고 따로 배합해 발랐고, 표면이 매끈하게 떨어지지 않아 흐린 날에는 벽이 빛을 조금 머금는다. 1층 한가운데를 잡은 재료는 붉은 옻칠. 조선 이전까지 거슬러 가는 한국 칠기 전통에서 가져왔다는 게 회사 설명이고, 붉은 래커를 입힌 거울과 문에 맞춤 브론즈 손잡이를 달았다.

5.2층 천장에는 고소미 작가가 이 자리를 위해 만든 캐시미어 샹들리에가 걸린다. 캐시미어를 파는 회사가 캐시미어로 조명을 짠 셈인데, 유리 샹들리에처럼 빛을 튕기지 않고 실이 빛을 먹어 아래로 흘린다. 이탈리아산 대리석과 석영, 천연 참나무, 올리브나무, 그래스클로스 벽지가 나머지를 채운다.

6.VIP 스위트에는 국내 채석장에서 직접 골라 온 돌 하나를 들여놨고, 이명진 작가의 세라믹 기둥이 그 옆에 선다. 피팅룸은 한지로 감쌌다. 한지는 빛을 통과시키되 흩뜨려서 옷을 입어 보는 사람의 그림자 경계가 흐려지는데, 옷의 실루엣을 파는 브랜드가 왜 이 재료를 골랐는지는 거울 앞에 서 봐야 안다.

7.왜 서울이었나. 첫 번째 답은 이 브랜드가 파는 물건의 성격에 있다. 로고가 없는 옷은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팔리고, 그 눈은 시장이 몇 년에 걸쳐 길러야 생긴다. 현대백화점 집계로 2025년 9월부터 11월까지 조용한 럭셔리 계열 브랜드의 매출이 1년 전보다 32.8% 늘었다. 로고를 지운 옷에 돈을 더 내는 훈련이 이미 끝난 시장에서는 브랜드를 설명하는 비용이 덜 든다.
8.두 번째 답은 골목이다. 도산공원 일대 대지 거래가는 3.3제곱미터당 2021년 2억 1,000만~2억 2,000만 원에서 2025년 3억 2,000만~4억 5,000만 원으로 올랐다. 4년 새 69%. 같은 기간 이 골목에 들어온 것이 프랑스 아웃도어 에이글(Aigle)의 국내 첫 플래그십, 닥터마틴(Dr. Martens), 비바이아, 폴뉴아 같은 대형 매장이다. 브랜드가 먼저 들어오고 땅값이 따라 오른 순서.

9.세 번째 답은 얼굴. 브랜드는 한국 진출과 거의 동시에 배우 차주영을 첫 앰버서더로 세웠다. 미국에서 같은 인지도를 사려면 얼마가 드는지 생각하면 계산이 선다. 국토가 좁고 매체가 몰려 있는 시장에서는 얼굴 하나가 전국에 닿는데, 이 효율이 아시아 첫 매장의 자리를 정하는 데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회사가 밝히지 않았다.

10.도산공원 상권의 평균 임대료는 3.3제곱미터당 46만 원인데, 같은 상권 안에서도 20만 원대부터 110만 원대까지 다섯 배 넘게 갈린다. 1층과 위층의 임대료가 다르기 때문. 층당 40평으로 놓고 1층에 90만 원, 2층에 45만 원, 3층 위로 22만 원을 각각 걸어 보면 월 8,000만 원 언저리가 나온다. 회사가 밝힌 조건이 아니라 상권 평균에서 역산한 추정치다.
11.파는 층이 둘이니 판매 면적은 80평. 월 8,000만 원을 그 80평으로 나누면 판매 1평이 지는 임대료가 100만 원이 된다. 임대료를 매출의 20%로 잡는 흔한 기준을 대면 필요한 매출은 월 4억 원. 이 브랜드의 온라인 평균 주문액이 600달러대이니 1달러 1,400원으로 놓고 84만 원, 월 480건, 하루 16건쯤 팔아야 한다.
12.하루 16건이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다. 다만 판매 면적 1평이 월 500만 원을 만들어야 성립하는데,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나 나오는 밀도이고 로드숍에서는 드물다. 이 계산이 잘 안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 매장을 읽는 열쇠다. 물건을 걸지 않은 세 개 층은 애초에 매출 계산에 들어 있지 않다.
13.계보를 보면 이 형식은 유럽 하우스가 쓰던 문법이다. 매장을 집처럼 꾸미고, 층마다 역할을 나누고, 위층에 예약 손님용 방을 둔다. 파는 면적을 줄이고 머무는 면적을 늘리는 대신 한 사람이 쓰는 돈을 키우는 구조인데, 이걸 감당하려면 보통 브랜드의 매출 규모가 상당해야 한다.

14.그런데 이 회사의 체급은 그쪽이 아니다. 매출의 72%가 온라인에서 나오고 나머지 28%가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노드스트롬(Nordstrom) 같은 도매 거래처와 230여 개 편집숍에서 나온다. 두브너가 공개적으로 말한 장기 목표는 매장 10~15개와 연 2억 달러 매출인데, 목표로 걸었다는 것은 지금 그 아래라는 말. 참고로 르메르(LEMAIRE)는 5년 만에 1,000만 유로에서 1억 유로로 올라섰고 토템(TOTEME)은 2024년에 3억 유로를 넘겼다. 온라인 회사가 첫 브랜드 하우스를 지어 보는 실험을, 서울이 가장 싸게 시켜 준 것으로 본다. 뉴욕 소호나 비벌리힐스에서 같은 다섯 층을 잡으면 임대료도 공사 기간도 이 골목과 비교가 안 된다.

15.로스앤젤레스의 온라인 니트 브랜드가 도산공원에 201평 다섯 층을 잡고 그중 두 층만 물건을 걸었다. 기억할 숫자는 다섯도 201도 아니고 40%. 판매 면적의 비율이다. 이 구조를 국내에서 따라 하면 디자인이 아니라 계약서에서 먼저 걸리는데, 이 골목의 A급 자리는 바닥 권리금만 5억 원까지 붙고 그 권리금은 매출을 안 내는 층에도 똑같이 매겨진다. 층을 비워 두는 결정은 임대인이 아니라 브랜드가 감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