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42에 프로-스펙스 서촌 플래그십이 문을 열었다. 예전에 이 브랜드 매장이 있던 건물을 헐지 않고 그대로 쓴 자리다. 그런데 개점 첫 한 달 동안 이 매장이 하는 일은 옷과 신발을 파는 게 아니라 전시를 거는 것이다. 올해로 80회를 맞은 춘천마라톤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10월 5일까지 두 개 층을 쓴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의 브랜드 부문은 3년 내리 매출이 줄었고 영업손실은 해마다 커졌다.
1.개점일은 2026년 9월 7일, 주소는 종로구 자하문로 42다. 경복궁 서쪽, 가로수가 늘어선 큰길 변에 선 4층 건물인데 브랜드가 쓰는 것은 아래 두 개 층이다. 예전에 이 브랜드 매장이 있던 자리라 회사는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본래 구조를 살린 채 필요한 기능만 더했다고 밝혔다. 문은 낮 12시에 열고 저녁 8시에 닫는다. 면적은 비공개.
2.개점을 알리는 첫 콘텐츠가 상품이 아니라 사진전이다. 제목은 〈Wish You Were Here〉, 기간은 9월 5일부터 10월 5일까지. 조선일보와 스포츠조선, 대한육상연맹이 함께 여는 춘천마라톤이 올해로 80회를 맞은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새 시즌 물건은 전시가 끝난 뒤에 들인다는 안내.

3.공간 설계는 스튜디오 씨오엠(Studio COM). 노출 콘크리트 골조와 테라조 바닥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흰 철제 프레임을 최소한으로 얹었다. 새로 바른 마감이 거의 없어 손이 닿는 자리마다 원래 건물의 표면이 만져진다. 테라조는 발소리를 먹지 않는다. 신발을 파는 브랜드가 걸음 소리가 남는 바닥을 그대로 뒀다.
4.1층은 매장 안팎을 오갈 수 있게 동선을 짜고 외벽 일부를 통유리로 둘렀다. 거리에서 안이 보이고 안에서 거리가 보인다. 노출 콘크리트를 그대로 둔 천장이 통유리 너머로 이어지니, 지나가는 사람 눈에는 매장과 골목의 경계가 흐리게 걸린다. 회사가 서촌을 고른 이유로 든 것도 사는 사람의 하루와 찾아오는 사람의 나들이가 섞인다는 점.

5.전시 내용은 기록표가 아니다. 사진가 장수인이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작품이 1층 벽 하나를 채우는데, 작은 필름 마운트 수백 장을 격자로 붙여 놓아 가까이 가야 한 장씩 읽힌다. 2층에는 러너 12명이 내놓은 소장품과 사연이 원목 상자 안에 눕혀져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와 전 국가대표 권은주도 그 12명에 들어 있는데, 전시가 앞세우는 것은 메달이 아니라 달리는 동안 마주친 사람과 풍경이다. 관람객이 엽서를 쓰는 프로그램도 함께.

6.국내 러닝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었다는 추정이 돌고, 러닝화 시장은 1조 원 규모로 큰다. 조깅을 해 봤다는 사람의 비율은 2021년 23%에서 2023년 32%로 올랐다. 시장이 이렇게 부푸는 동안 이 브랜드의 매출은 반대로 갔다. 2024년 1,290억 원이던 것이 2025년 952억 원으로 내려앉았다. 파도가 온 자리에서 배만 뒤로 밀렸다.
7.그 1,000만 명 가운데 대회에 나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기록을 재지 않고 그냥 뛰는 쪽이 훨씬 많다. 그런 시장에서 브랜드가 올해 봄부터 내건 문장이 '모두를 위한 스포츠'였고, 메달 대신 엽서와 소장품을 거는 전시가 그 문장을 공간으로 옮기는 방식. 브랜드 창고에 남은 것은 기록인데, 지금 팔리는 것은 기억 쪽이다.

8.브랜드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프로-스펙스는 1981년 국제상사가 국내 시장에 내놓은 국산 스포츠 브랜드였고, F자 두 겹 날개 로고는 1976년부터 쓰였다. 80회를 채운 대회와 45년을 채운 브랜드가 한 벽에 붙는 구도인데, 둘 사이에 원래 있던 접점은 후원 계약 하나뿐이었다. 그 접점을 이야기로 늘리는 게 이번 전시가 하는 일.

9.운영사가 공시한 브랜드 부문 숫자는 이렇다. 매출 2023년 1,661억 원, 2024년 1,501억 원, 2025년 1,132억 원. 영업손실은 같은 순서로 94억, 136억, 164억 원. 매출이 3년 만에 3분의 1 가까이 빠지는 동안 손실은 1.7배가 됐다. 회사가 밝힌 원인은 리브랜딩을 앞두고 낸 가을·겨울 신상품의 판매 부진, 그리고 수익성 위주로 유통을 바꾸는 작업이 늦어진 것이었다.
10.그 장부를 들고 고른 자리가 지금 서울에서 임대료가 가장 빨리 오르는 골목 중 하나다. 서촌 노면 상가의 월 임대료는 1,000만 원대에서 2,000만 원 중반대로 형성돼 있는데, 3년 전 500만 원 선이었다는 증언과 견주면 네 배 가까이 뛴 값. 재계약에서 1,500만 원이 3,000만 원으로 바뀐 사례도 올해 봄 보도에 나왔다.

11.전시가 걸린 한 달은 판매 매출이 사실상 없는 기간. 월세를 2,000만 원으로 잡고 인건비와 관리비를 더하면 그 한 달의 운영비는 3,000만 원 안팎이다. 회사가 밝힌 값이 아니라 동네 시세로 잡은 계산. 브랜드 부문의 지난해 영업손실 164억 원과 나란히 놓으면 0.2%가 안 되는 금액인데, 같은 돈을 매체 광고에 쓰면 한 주도 못 간다. 매장 한 채를 한 달짜리 광고 자리로 바꾼 계산.

12.이 브랜드는 2023년부터 춘천마라톤 공식 후원사였고, 계약을 2028년까지 3년 더 늘렸다. 80회 기념 상품은 참가권에 기념 배지와 전용 가방, 카본 레이싱화를 묶어 파는 구성. 대회 참가라는 확정 수요에 신발 한 켤레를 얹어 파는 방식이라, 신발만 매대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 전환이 확실하다.

13.이 동네에 스포츠 브랜드가 들어온 게 처음도 아니다. 아디다스 퍼포먼스와 살로몬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아웃도어 브랜드 몽벨도 왔다. 서촌은 지난 몇 해 사이 식당과 공방이 채우던 골목에서 패션·뷰티 매장이 값을 매기는 상권으로 바뀌었다. 속도를 보여 주는 기록 하나. 한 식당 건물이 38억 원에 팔리며 평당 1억 5,000만 원대를 찍었다.

14.앞서 온 몽벨은 이 브랜드와 한 회사 소속이다. 한 동네에 두 간판이 걸렸는데 성적표는 갈렸다. 몽벨은 지난해 매출이 211억에서 180억으로 줄었지만 영업손실을 33억에서 10억으로 좁혔고, 직수입 체계로 바꾼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매출을 줄이면서 손실을 좁힌 쪽과 매출도 손실도 나빠진 쪽. 이번 매장은 뒤쪽이 내놓은 답.
15.45년 된 국산 스포츠 브랜드가 옛 매장 자리에 두 개 층을 다시 얻어 놓고, 첫 한 달을 물건 대신 80회를 맞은 마라톤 대회의 사진에 내줬다. 매출은 한 해 만에 1,290억에서 952억으로 빠졌는데, 그걸 되돌리겠다는 답이 상품 진열이 아니라 전시였다. 이런 매장을 국내에서 굴릴 때 발목을 잡는 것은 임대차 기간이다. 콘텐츠로 매장을 채우는 방식은 회수에 최소 2~3년이 걸리는데, 서촌처럼 3년 만에 임대료가 네 배로 오른 골목에서는 계약 5년이 끝나기 전에 갱신 협상이 먼저 온다. 브랜드 자산을 쌓는 속도보다 임대료가 오르는 속도가 빠르면, 쌓은 자산은 건물주에게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