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Melbourne)의 한 부부가 카페 한복판에 로스터를 놓았는데, 이 기계에는 가스가 들어가지 않는다. 호주 최초의 올-일렉트릭 로스터. 가스가 없다는 그 한 줄이 실은 커피 이야기가 아니라 부동산 이야기다.
1.올해 초 멜버른 브런즈윅 이스트(Brunswick East)에 카페 하나가 열렸다. 이름은 Contraband, 부부인 제시·크리스 레게(Jesse & Chris Legge)가 운영한다. 2018년 프레스턴 마켓(Preston Market) 옆 작은 노점으로 시작한 로스터의 두 번째 매장.
2.파는 건 커피. 다만 이 집의 무기는 원두가 아니라 로스터 그 자체다. 매장 한복판에 로스팅 기계를 놓고 원두가 볶이는 전 과정을 손님이 다 보게 했고, 그 기계는 가스를 쓰지 않는다.
3.기계는 독일 프로밧(Probat)의 P12E, 2023년 나온 이 회사 최대 용량의 올-일렉트릭 로스터. 배치당 최대 12kg, 시간당 40kg를 볶는다. 가스 버너가 앉아야 할 자리에 전기 히팅이 들어갔다.

4.크리스 레게의 말은 노골적이다. "호주에서 올-일렉트릭 로스터를 돌리는 건 우리가 처음이다." 그 로스팅을 뒤편 작업실이 아니라 손님 눈앞에서 돌린다.
5.메뉴는 정공법. 에스프레소·푸어오버·콜드브루, 여기에 카스카라 스프리츠(말린 커피 열매 껍질로 만든다)를 얹었다. 페이스트리는 인근 Ocab 베이커리와 Cake House Collective에서 받고, 원두는 2종 블렌드에 싱글오리진 다섯 종을 돌린다.

6.왜 지금까지 로스터는 다 가스였나. 로스팅은 콩에 열을 밀어넣는 작업이고, 가스 불꽃은 그 열을 즉각 올렸다가 즉각 거둔다. 이 응답성이 로스팅 프로파일의 생명인데, 전기 히터는 굼뜨다는 게 오랜 통념이었다.
7.프로밧의 전기 라인이 한 일은 "가스 버너처럼 다루는 느낌"을 전기로 구현한 것, 곧 응답성 문제를 푼 것. 안 되던 게 됐다.
8.진짜 포인트는 맛이 아니라 배관. 가스 로스터를 매장에 넣으려면 딸려오는 게 많다. 후드, 덕트, 애프터버너(연기·냄새 태우는 장치), 급기 시스템, 가스 배관. 이 인프라 전체가 깔린 뒤에야 불을 켤 수 있다.

9.벤트리스 전기 로스터는 이걸 다 지운다. 필요한 건 200~240V, 30A짜리 전기 회로 하나. 연기와 휘발성 유기화합물(VOC)은 기계가 제 안에서 태워 걸러내니 굴뚝이 필요 없다.
10.그래서 로스터가 바 뒤, 손님 바로 앞까지 나온다. 후드와 덕트가 사라지면 기계를 숨길 이유가 없어지고, 로스팅은 '뒤에서 하는 공정'에서 '매장 앞 무대'로 걸어 나온다. 별도 인테리어도 필요 없다. 기계 자체가 오브제니까.

11.첫째, 투명성. 손님이 원두 볶는 걸 눈앞에서 본다. "이 커피가 어디서 왔나"를 넘어 "지금 여기서 볶는다"로 간다. 신선도가 말이 아니라 장면이 된다.
12.둘째, 덜 태운다는 이야기. 연소가 없으니 CO₂와 매연이 줄어든다. 기후 변화로 커피 산지가 실제로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는 태우지 않는다"는 문장은 그냥 착한 소리가 아니라 브랜드의 입장이 된다.
13.셋째, 구경거리(retail theater). 커피는 이미 레드오션인데, 드럼이 돌고 갓 볶인 원두가 쿨러로 쏟아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된다. 손님이 찍어 올린다. 마케팅비가 붙지 않는 마케팅이 매장 안에서 돌아간다.

14.처음은 아니다. 미국 벨웨더(Bellwether)가 카페용 벤트리스·전기·자동 로스터를 먼저 상용화했다. 220V 콘센트에 꽂고, 공사 없이, 카운터 위에 올린다. 가격은 2만 2천 달러부터, SCA 신제품상을 받았다.

15.벨웨더는 2023년 일본·유럽으로 넘어가 무인양품(無印良品)과 손을 잡았다. "카페가 곧 로스터리"는 이미 글로벌 흐름이고, 그 전제는 가스를 끊는 기술.

16.로스팅을 보여주는 것 자체는 오래된 셀링포인트다. Blue Bottle과 % Arabica가 대형 플래그십의 오픈 로스터리로 이걸 팔았는데, 가스 인프라를 감당할 규모가 있어야 했으니 큰 매장에서만 가능한 장치였다. 전기·벤트리스가 그 무대를 작은 매장까지 끌어내렸다.

17.프로밧의 전기 라인 자체도 계보가 있다. P01 → P05e → P12e(2023, 최대 용량). 산업의 무게중심이 조용히 전기로 넘어가는 중이다.
18.이 이야기의 진짜 반전은 '친환경'이 아니라 부동산. 가스 로스터 인프라(후드·덕트·애프터버너·급기·가스라인)를 다 갖추면 2만 2천~6만 3천 달러가 든다. 전기 벤트리스는 200~240V 회로 하나면 끝난다.
19.설치비 차이만 1만 5천~4만 달러. 3년 총소유비용(TCO)으로 봐도 전기가 앞선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하지만 오너에게 더 큰 건 넣을 수 있는 임차 자리가 늘어난다는 쪽이다.
20.가스와 후드가 안 되는 자리, 쇼핑몰 인샵과 건물 상층부와 굴뚝 못 뚫는 좁은 1층 공실에도 로스터리가 들어간다. '로스터리 카페'를 옭아매던 입지 제약이 통째로 풀린다. 이게 발상의 진짜 크기.

21.로스팅 공정은 커피 한 잔 탄소발자국의 약 15%, 마케팅 문구로 쓰기 딱 좋은 크기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집이 산 것은 탄소 감축이 아니라 '자리를 안 가리는 로스터'다.
22.이 편의 교훈은 기계 스펙이 아니다. 노점에서 시작한 부부가 굴뚝을 지운 기술 하나로 남들 못 들어가는 자리에 로스터리를 세웠고, 아낀 설치비 1만 5천~4만 달러보다 임차할 수 있는 자리의 종류가 바뀐 쪽이 크다. 다만 이 발상을 국내에 옮기면 전기에서 한 번 걸린다. 12kg급은 순간 전력이 커서 기존 상가 계약전력으로 모자라고 승압에 한전 불입금이 붙으니, 좁은 1층이라면 1.5~3kg급으로 급을 낮춰 기계가 아니라 발상만 가져오는 편이 맞다. 큰 물량이 아니라 제약을 지운 발상이 이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