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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키텍처 <더 비치>(2015). 내셔널 빌딩 뮤지엄 그레이트홀에 재활용 공 100만 개를 부었다 (ⓒArchDaily·Noah Kalina)
스나키텍처 <더 비치>(2015). 내셔널 빌딩 뮤지엄 그레이트홀에 재활용 공 100만 개를 부었다 (ⓒArchDaily·Noah Kalina)
데일리 컬처

제일 좋은 방을 복도로 쓰고 있었다 (스나키텍처)

2026.07.16

워싱턴의 한 미술관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실내 공간을 100년 동안 그냥 지나다니는 곳으로 썼는데, 11년 전 거기에 공을 100만 개 부었더니 18만 명이 줄을 섰다. 올여름엔 그 자리에 비계를 세웠다.

1.지난 7월 3일, 워싱턴 D.C.의 내셔널 빌딩 뮤지엄(National Building Museum)이 여름 설치작 <더 플레이그라운드(The Playground)>를 열었다. 8월 30일까지 목~월 10~17시에 열고 화·수는 닫는다. 성인 $18.95, 청소년·시니어 $15.95. 표는 시간지정제로만 판다.
2.규모가 393평(14,000제곱피트)으로 이 미술관 140년 역사상 최대 실내 설치물인데, 웬만한 중형 미술관 전시실 하나가 통째로 들어앉는 넓이를 방 한 칸에 놀이터로 채웠다.
3.설계는 뉴욕 스튜디오 스나키텍처(Snarkitecture), 협업은 글루텐(Gluten), 프레젠팅 스폰서는 아마존이다. 재료 목록을 보면 비계(scaffolding), 자작나무 합판, 코르크, 로프, 재활용 바닥재. 전부 공사장 구석에 굴러다니는 것들인데,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컨셉이다.
4.아홉 개 구역으로 쪼갰다. 슬라이드와 터널이 박힌 중앙의 언덕(The Hill), 100피트짜리 장애물 코스, 15피트 클라이밍 월, 로프 해먹, 스포츠 코트, 미로처럼 굽은 웨이비 월(Wavy Wall), 코르크를 채운 디그 핏(Dig Pit), 직접 뭘 만들어보는 어드벤처 야드(Adventure Yard), 제일 어린 애들용 톳 스팟(Tot Spot).
<더 플레이그라운드>의 아홉 개 구역. 슬라이드가 박힌 중앙 언덕과 클라이밍 월 (ⓒDezeen·Noah Kalina)
<더 플레이그라운드>의 아홉 개 구역. 슬라이드가 박힌 중앙 언덕과 클라이밍 월 (ⓒDezeen·Noah Kalina)
5.오늘 할 얘기는 놀이터가 아니라 이 놀이터가 놓인 '방'이다.
6.무대는 그레이트홀(Great Hall)이라는 방이다. 군수감이던 몽고메리 메이그스(Montgomery Meigs)가 1881년에 설계해 1887년에 올린 옛 연금국 건물(Pension Building)의 중앙 홀로, 남북전쟁 북군 전사자를 기리려고 지은 집이다.
7.이 방 한가운데 코린트 양식 기둥 여덟 개가 서 있다. 높이 75피트, 약 23m니까 8층 건물과 나란하다. 지름 8피트, 둘레 25피트. 기둥 하나에 벽돌이 7만 장 들어갔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전 기둥 축에 든다.
그레이트홀 한가운데 선 75피트 코린트 기둥 여덟 개. 8층 건물 높이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Alex Erkiletian)
그레이트홀 한가운데 선 75피트 코린트 기둥 여덟 개. 8층 건물 높이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Alex Erkiletian)
8.메이그스는 이걸 미켈란젤로가 손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성당에서 베껴왔다. 벽돌로 쌓아 올린 뒤 1895년에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했으니, 이 기둥부터가 가짜 대리석. 태생부터 값싼 재료로 기념비를 흉내 낸 집이었고, 이 얘기는 뒤에서 다시 나온다.
9.방이 얼마나 좋았냐면, 완공 20년 안에 대통령 취임 무도회가 다섯 번 열렸다. 클리블랜드·해리슨·매킨리·시어도어 루스벨트·태프트. 클리블랜드는 하도 급해서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임시 지붕을 씌우고 무도회를 열었다.
10.1980년, 의회가 이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미술관은 이 방에 전시를 걸지 않고 옆방 갤러리에 걸었다. 그레이트홀이 맡은 일은 표 사고, 지나가고, 화장실 찾아가는 것. 복도였다.
11.미국에서 손꼽히는 실내 공간을 100년 동안 동선으로 썼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복도.
12.2014년에 미술관이 이걸 뒤집었다. 비야케 잉엘스(Bjarke Ingels)의 BIG한테 그레이트홀을 통째로 내주고 미로를 짓게 했으니, '서머 블록 파티(Summer Block Party)'의 시작이다.
서머 블록 파티 2017 <하이브>(스튜디오 갱). 종이 튜브 2,700개로 쌓은 방 (ⓒArchDaily·Tim Schenck)
서머 블록 파티 2017 <하이브>(스튜디오 갱). 종이 튜브 2,700개로 쌓은 방 (ⓒArchDaily·Tim Schenck)
13.이듬해 2015년, 스나키텍처가 여기에 <더 비치(The BEACH)>를 깔았다. 281평 바닥에 재활용 투명 플라스틱 공을 거의 100만 개 부어 '바다'를 만들고, 폭 50피트 '해안선'에 비치체어와 파라솔을 놨다. 끝엔 거울벽을 세워 바다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14.18만 명 넘게 왔다. 미술관 역대 여름 최고 기록. 어른들이 미술관 볼풀에 들어가겠다고 줄을 섰다. 지금 요금 $18.95를 그 인원에 곱하면 티켓 매출만 340만 달러어치인데, 2015년 당시 요금은 이보다 낮았으니 자릿수만 보면 된다.
<더 비치>(2015)의 거울벽. 공의 '바다'가 무한히 이어져 보인다 (ⓒAndy Feliciotti)
<더 비치>(2015)의 거울벽. 공의 '바다'가 무한히 이어져 보인다 (ⓒAndy Feliciotti)
15.'어른도 놀고 싶다'는 답은 너무 싱겁다.
16.미술관은 원래 "만지지 마시오"의 집이다. 그중에도 건축 미술관이 제일 딱하다. 건축을 도면·모형·사진으로 보여주니, 실물 크기 예술을 축소 모형으로 파는 가게. 사람이 안 오는 게 당연했다.
17.그레이트홀은 그 자체가 실물 크기 건축인데, 정작 이 방을 지나다닌 사람들은 방을 본 적이 없다. 복도는 보는 데가 아니라 통과하는 데니까.
18.스나키텍처가 한 일은 이 방에 뭘 '설치'한 게 아니라 사람을 이 방에 붙잡아 눕힌 것이다. 공에 파묻혀 누우면 시선이 어디로 가나. 위로 간다. 75피트 기둥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볼풀은 사람을 눕히는 장치였다.
19.줄 선 이유는 공놀이가 아니라 평생 통과만 하던 기념비에 처음으로 몸이 닿았기 때문. 좋은 공간을 죄다 사진으로만 소비하는 시대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실물 크기 공간은 희소해졌다.
올여름 <더 플레이그라운드>(2026). 비계·자작합판을 흰색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노출했다 (ⓒThe Architect's Newspaper·Noah Kalina)
올여름 <더 플레이그라운드>(2026). 비계·자작합판을 흰색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노출했다 (ⓒThe Architect's Newspaper·Noah Kalina)
20.여기서 스나키텍처를 좀 알아야 한다. 2008년 아티스트 대니얼 아샴(Daniel Arsham)과 건축가 알렉스 무스토넨(Alex Mustonen)이 차렸고, 쿠퍼유니온(Cooper Union) 동창이다. 2014년 벤저민 포토(Benjamin Porto)가 파트너로 합류. 회사 이름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1876년 시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에서 땄는데, 있지도 않은 괴물을 잡으러 가는 얘기다. 슬로건은 "not art, not architecture", 자기 입으로 예술도 건축도 아니라고 한다. 트레이드마크는 전부 흰색. 색을 싹 빼고 형태·빛·질감만 남긴다.
스나키텍처를 세운 대니얼 아샴·알렉스 무스토넨·벤저민 포토 (ⓒSurface Magazine)
스나키텍처를 세운 대니얼 아샴·알렉스 무스토넨·벤저민 포토 (ⓒSurface Magazine)
21.2015년 <더 비치>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아까 안 썼다. 비계, 목재 패널, 타공 메시. 2026년 <더 플레이그라운드>와 거의 같은 재료인데, 2015년엔 그걸 전부 흰색으로 칠해 덮었다(clad in stark white).
22.2026년엔 안 덮었다. 비계를 비계 그대로, 자작 합판을 합판 그대로 뒀다. 11년 걸려서 페인트를 벗겼는데, 1895년에 벽돌을 대리석처럼 칠했던 그 방에서 이번엔 아무것도 칠하지 않기로 했다. 흰색이라는 장치가 없어도 방이 알아서 일한다는 걸 이제 안다.

2015 <더 비치> · 비계 · 목재패널 · 타공메시 · 흰색 클래딩으로 싼 뼈대를 숨겼다

2026 <더 플레이그라운드> · 비계 · 자작합판 · 코르크 · 로프 · 클래딩 없이 싼 뼈대가 곧 마감

23.<더 비치> 이듬해인 2016년, 뉴욕에 뮤지엄 오브 아이스크림(Museum of Ice Cream)이 생겼다. 분홍 방, 스프링클 풀장. 컬러 팩토리(Color Factory)도 나왔고 소위 '인스타 미술관' 붐이 터졌다. 다들 <더 비치>를 봤고, 다들 볼풀을 베꼈다. 결과는 갈렸다. 인스타 미술관들이 우르르 포화되며 신선도가 희석되는 동안 뮤지엄 오브 아이스크림은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지점이 문을 닫았고, 서머 블록 파티는 13년째 굴러간다. 올해가 <더 플레이그라운드>다.
뮤지엄 오브 아이스크림의 분홍 스프링클 풀. <더 비치>의 볼풀을 베낀 '인스타 미술관'의 상징 (ⓒMuseum of Ice Cream)
뮤지엄 오브 아이스크림의 분홍 스프링클 풀. <더 비치>의 볼풀을 베낀 '인스타 미술관'의 상징 (ⓒMuseum of Ice Cream)
24.왜 갈렸나. 베낀 쪽은 공을 샀고, 안 베껴진 건 방이었다. 분홍 페인트와 볼풀은 몇천만 원이면 어디든 깐다. 75피트 코린트 기둥 여덟 개는 못 산다. <더 비치>의 상품은 볼풀이 아니라 그레이트홀이었고, 볼풀은 그 방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미끼였다. 그걸 오해한 사람들이 미끼만 복사해 팔다가 유통기한이 끝났다. 배경은 베낄 수 있고, 방은 못 베낀다.
25.그래서 이 미술관은 매년 다른 건축가에게 같은 방을 내준다. 2014 BIG 미로 → 2015 더 비치 → 2016 아이스버그(James Corner, 최고 56피트) → 2017 하이브(Studio Gang, 종이 튜브 2,700개) → 2018 펀 하우스(Fun House, 스나키텍처) → 2019 론(Rockwell Group, 사탕수수·대두) → 2023 룩 히어(Look Here) → 2026 더 플레이그라운드. 상품은 매번 바뀌는데 자산은 안 바뀐다. 설치비는 해마다 새로 나가지만 그 자리를 프레젠팅 스폰서가 메우고, 미술관이 회수하는 쪽은 여름 한 철에 몰리는 시간지정 티켓이다. 13년을 버틴 구조가 여기 있다.
서머 블록 파티 2016 <아이스버그>(제임스 코너). 최고 56피트의 '빙산' (ⓒArchDaily·Tim Schenck)
서머 블록 파티 2016 <아이스버그>(제임스 코너). 최고 56피트의 '빙산' (ⓒArchDaily·Tim Schenck)
서머 블록 파티 2018 <펀 하우스>(스나키텍처). 온통 흰색으로 덮은 회고전 (ⓒDezeen·Noah Kalina)
서머 블록 파티 2018 <펀 하우스>(스나키텍처). 온통 흰색으로 덮은 회고전 (ⓒDezeen·Noah Kalina)

내셔널 빌딩 뮤지엄은 8월 30일까지 393평짜리 놀이터를 그레이트홀에 들여놨고, 75피트 코린트 기둥 여덟 개가 선 이 방을 100년 동안 복도로만 쓰다 11년 전에야 사람을 눕히는 데 썼다. 남는 숫자는 18만 명. 볼풀 값이 아니라 방 값이다. 국내에서 같은 걸 하려면 도면에서 걸린다. 층고와 빛이 제일 좋은 칸에는 보통 창고나 복도, 아니면 사람이 눈 감고 누워 있는 방이 붙어 있다. 그 칸을 손님이 깨어 있는 용도로 돌리는 결정은 설치물 하나 들이는 일보다 훨씬 늦게 훨씬 비싸게 온다. 덮는 마감을 걷어내는 쪽이 공사비와 브랜드를 같이 살린다는 계산도, 견적이 확정되기 전에만 쓸 수 있는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