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시소가 다섯 번째 지점을 열었다. 자리가 뜻밖이다. 미술관 거리도, 힙한 골목도 아닌 구의역 옆 재개발 아파트 단지의 백화점 2층. 연 100만 명이 표를 끊고 사진을 찍으러 드나드는 이 전시 회사는 지난해 1,000억 원 몸값으로 110억을 투자받았다. 그런 회사가 신축 복합단지의 문화 간판으로 걸어 들어왔다. 개관은 7월 17일, 두 개의 원화전이 나란히 걸렸다.
1.그라운드시소 이스트. 광진구 자양동 이스트폴 안, NC백화점 2층에 문을 열었다. 개관전은 두 그림책 작가의 원화전이다. 조은 원화전 '오늘의 정원'과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둘 다 7월 17일부터 1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 입장 마감은 6시.
2.이스트폴이라는 이름부터 이 이야기의 절반이다. 자양1구역을 갈아엎은 도시정비형 재개발 단지고, 롯데캐슬 이스트폴 아파트 1,063세대에 오피스동이 하나 붙는다. 그 오피스에는 쿠팡 본사가, 상업동에는 NC백화점이 들어왔다. 설계는 해안건축, 한강을 남쪽에 두고 구의역에서 걸어 닿는다. 전시장이 앉은 곳은 그 상업동의 문화 앵커 자리.

3.원화전이라는 포맷을 뜯어보면 이 회사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림책 원화는 종이 한 장이다. 크게 봐야 전지 크기, 액자에 걸면 스무 점이라도 20분이면 다 본다. 그라운드시소는 그 스무 장을 방 여러 개로 늘린다. 관객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 안을 걷는다.
4.두 전시의 결이 갈린다. 조은의 '오늘의 정원'은 도시에 살며 쌓인 기억과 감정이 정원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 연작이고, 이기훈의 '내일의 낙원'은 노아의 방주 설화에서 재난 이후의 희망을 길어 올린다. 오늘의 정원과 내일의 낙원. 개관 라인업의 두 제목을 붙여 읽으면 그대로 한 문장이 된다.

5.이 방들을 짓는 회사가 미디어앤아트다. 2014년에 세워져 지금은 애니플러스의 자회사인데, 자체 화가도 소유한 IP도 없다. 남의 그림, 남의 캐릭터, 남의 사진을 빌려 와 공간으로 짓는다. 국내 첫 반 고흐(Van Gogh) 미디어아트를 시작으로 앨리스, 유미의 세포들, 요시고(Yosigo) 사진전까지 30여 차례. 붓을 든 적은 없지만 전시는 누구보다 많이 지었다.

6.동선이 곧 매출 설계다. 예매로 입장하고, 방을 지나고, 정해진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마지막에 굿즈숍으로 쏟아진다. 관람 자체가 콘텐츠고 나가는 길이 매대인 구조. 원화전은 특히 아이 손을 잡은 부모를 부른다. 티켓 한 장이 두세 명을 데려오는 장르.

7.사진을 찍으러 표를 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시소 누적 관객은 500만을 넘겼고, 연 100만 명이 꾸준히 든다. 힙하지 않아도 통한 비결은 만만함이었다. 미술관의 문턱은 낮추고, 대신 사진이 잘 나오는 벽을 높였다. 이해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찍으러 가는 곳.
그림 한 점 없이 번 숫자 · 그라운드시소(미디어앤아트)
8.백화점이 이 전시장을 원하는 이유는 반대편에 있다. 신축 복합단지 상업시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공실과 죽은 위층이다. 전시장은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을 끌고, 머무는 시간이 길고, 가족을 통째로 데려온다. 한 층의 트래픽을 혼자 만드는 세입자. 백화점이 사는 건 임대료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발걸음.

9.원화전 티켓은 성인 기준 1만5천 원 안팎이 이 회사 전시의 통상가다(개관 요금이 확정 공개되지 않아 통상가로 추정한다). 연 100만 명에 이 단가를 곱하면 티켓 매출만 100억대가 된다. 여기에 엽서·프린트·인형으로 이어지는 굿즈가 얹힌다. 전시장 뒤 굿즈숍 객단가가 티켓값을 넘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10.그래서 지난해 여름 숫자가 나왔다. 2024년 7월, 미디어앤아트는 110억 원 규모 시리즈 A를 유치했다. 에이치비인베스트먼트와 타임폴리오자산운용이 주도했고, 이들이 가져간 지분이 11.11%. 거꾸로 계산하면 회사 몸값은 약 1,000억 원이다. 그림 한 점 소유하지 않은 전시 회사가 스타트업의 밸류로 값이 매겨졌다.
누가 무엇을 얻나 · 재개발 단지와 전시장
11.부동산 쪽에서 보면 더 선명하다. 재개발 상업시설은 앵커테넌트가 절반이다. 전시장은 임대료를 다 못 내도 트래픽으로 제 몫을 한다. 감면이든 매출연동이든, 복합단지는 문화시설 하나로 분양가와 브랜드값을 사고 전시 회사는 신축의 유동인구를 헐값에 가깝게 얻는다. 한 공간에서 열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지갑.

12.몰입형 전시의 역사는 짧지만 가파르다. 반 고흐 미디어아트가 문을 열었고, 아르떼뮤지엄이 규모를 키웠고, 요시고와 그림책 원화가 대중을 데려왔다. 처음 이 전시들의 자리는 '미술관 옆 카페'였다. 지금은 '백화점 안 미술관'.

13.그런데 이 회사가 가진 그림은 한 점도 없다. 500만을 모은 힘도 결국 남의 IP와 작가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요시고,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그림책 작가들. 빌린 이름이 뜨면 같이 뜨지만, 라이선스료와 독점 기간에 발목이 잡힌다. 소유하지 않고 연출로만 버는 회사의 천장이 거기 있다.

14.사진을 찍으러 표를 끊는 전시가 재개발 단지의 문화 간판이 됐고, 그 회사는 그림 한 점 없이 연 100만 관객과 1,000억 몸값을 손에 쥐었다. 1만5천 원짜리 티켓 한 장이 굿즈와 트래픽으로 몇 번씩 다시 팔리는 구조다. 이걸 작은 공간에서 흉내 내려면 둘을 먼저 넘어야 한다. 앵커로 들어가 임대료를 깎으려면 '내가 이 층의 발걸음을 만든다'를 숫자로 증명해야 하고, 자체 IP가 없으면 라이선스료가 마진을 먼저 먹는다. 전시의 완성도보다 그 두 장의 증명이 앞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