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한국 첫 단독전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9월 30일까지 열린다.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80점이 한국에 처음 건너왔다. 성인 관람료는 2만 원. 그런데 벽에 걸린 유화 원작은 한 점도 없다.
1.판화집이 왔다. 이번 전시의 실체는 1799년 고야가 새긴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80점이다. 스페인 왕립미술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가 고야의 원판으로 찍어 낸 정식 판본. 서양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연작이 한국에 통째로 건너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2.6월 26일 문을 열어 9월 30일까지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월요일은 쉬고 수요일만 밤 9시까지 연다. 성인 2만 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1만6천 원. 전시는 궁정화가 시절부터 말년까지를 여섯 부로 짰다.

3.동선은 고야의 삶을 따라간다. 왕의 초상을 그리던 궁정화가로 시작해, 병으로 청력을 잃고, 전쟁을 목격하고, 마지막에 자기 집 벽을 어둠으로 채운 노년에서 끝난다. 그 한복판에 카프리초스가 놓인다. 밝은 궁정에서 어두운 말년으로 넘어가는 경첩 같은 자리.

4.전시가 통째로 재현한 공간이 하나 있다.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다. 고야가 청력을 완전히 잃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살던 마드리드 외곽의 집. 그는 이 집 벽에 물감을 직접 발라 열네 점의 검은 그림(Pinturas negras)을 남겼다. 관객을 부르려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벽에, 자기가 본 괴물을 그렸다.

5.여기서 걸리는 게 있다. 그 검은 그림도, 다른 유화 원작도, 이 전시에는 실물이 없다. 벽에 걸린 진짜 작품은 카프리초스 판화 80점뿐이고 나머지는 미디어아트와 인쇄물로 채웠다. 한 미술 전문지는 원화 전시로 알고 표를 샀다가 판화전이었다는 관객 불만을 전했다. '고야의 일생을 온전히 경험한다'는 홍보 문구와 실제 사이의 거리.
전시장에 실제로 걸린 것 · 실물과 재현
6.그래도 이 전시가 사람을 끄는 힘은 제목에 있다. 카프리초스 43번의 이름이 그대로 전시 제목이 됐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사람 위로 부엉이와 박쥐가 몰려드는 그 판화. 250년 전 문장인데, 오늘 어느 타임라인에 올려도 어색하지 않다.

7.고야가 이 연작을 새긴 1799년의 스페인은 종교재판과 미신, 부패가 뒤엉킨 곳이었다. 그는 이성이 잠든 자리에서 무엇이 기어 나오는지를 80장에 걸쳐 그렸다. 마녀와 당나귀 귀족, 얼굴 없는 권력. 우화의 옷을 입혔지만, 겨눈 건 당대 사회. 불안과 분열이라는 감각은 시대를 갈아입어도 살아남는다.

8.고야가 유화가 아니라 판화를 고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판화는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다. 찍어 내는 만큼 퍼지고, 퍼지는 만큼 위험을 나눠 진다. 궁정에서 왕을 그리던 손으로 그 사회를 조롱하려면, 벽에 거는 유화보다 손에서 손으로 도는 판화가 맞았다. 얼마든지 찍어 낼 수 있다는 게 곧 이 매체의 힘.

9.성인 2만 원은 국내 미술관 관람료에서 비싼 축이다. 국공립 미술관 상설전이 보통 몇천 원이고 무료도 흔한데, 이런 기획전은 그 서너 배를 받는다. 그럼 이 값은 어디서 정당화될까. 티켓값에 이미 답이 들어 있다. 흥행을 겨눈 상업 전시라는 답.
판화라서 성립하는 블록버스터 · 대여 부담 비교
10.판화가 핵심인 게 여기서 다시 걸린다. 유화 진품을 빌려 오는 블록버스터는 돈이 다르게 든다. 작품 하나에 수십억짜리 보험, 항온항습 운송, 전담 에스코트가 붙는다. 반면 카프리초스는 왕립아카데미가 여러 세트를 찍어 낸 판본이라, 대여도 보험도 진품 유화와는 자릿수가 다르다(추정). 홍보는 '거장의 일생'으로 팔고 실물은 대여가 가벼운 판화로 채운다. 2만 원짜리 표로 거장 80점을 걸 수 있는 구조가 여기서 나온다. 실물은 판화, 이름은 유화.
11.입장수입만 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전시의 회수는 표와 굿즈, 도록이 함께 돈다. 전시 끝의 상점에서 엽서와 마그넷과 도록이 팔리고, 그 객단가가 티켓만큼 붙기도 한다(추정). 카프리초스처럼 이미지가 센 판화는 굿즈로 옮기기에도 좋다. 어두운 부엉이 한 마리가 티셔츠 위에서 다시 팔린다.

12.이 전시의 방식은 익숙하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반 고흐, 뭉크 같은 거장의 이름을 건 티켓형 전시를 꾸준히 걸어 왔다. 진품이 적어도 미디어아트와 재현 공간으로 채우고, 거장의 이름값으로 관객을 부르는 방식. 고야 전도 그 연장선에 있다.

13.그 방식이 이번엔 역풍을 맞았다. 관객은 유화 원작을 기대하고 왔고, 벽에는 판화와 영상이 걸려 있었다. 미술계에서도 '판화전이면 판화전이라고 먼저 밝혔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작 실제로 온 카프리초스 80점의 값어치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작품이 아니라 그걸 파는 방식이었다.
14.250년 전 판화 80점이 2만 원짜리 표를 받고 한가람미술관에 걸렸다. 원화를 기대한 관객과 그 판화의 값어치 사이에서 홍보가 미끄러졌다. 거장의 이름을 빌려 공간을 채우려면 콘텐츠가 아니라 홍보와 실물의 간극에서 걸린다. 이름값으로 표는 팔린다. 그러나 문 앞에서 말한 것과 안에서 보여 준 것이 어긋나면, 그 거리만큼 다음 전시의 표가 안 팔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