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이대원 회고전이 열렸다. 유화 120여 점에 자료 100여 점, 11월 8일까지. 표값은 2,000원이다. 이 화가는 법을 배웠고 회사를 세웠다가 마흔 가까이에 붓을 잡았고, 그 사이 한국에서 처음 문을 연 그림 가게를 맡아 굴렸다. 그 가게 직원이 나중에 갤러리현대를 세운다. 지금 그의 그림은 최근 5년간 466번 경매에 올라 79억 원어치가 팔렸다.
1.전시 제목은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덕수궁관 1·2·3·4전시실을 전부 쓴다. 유화 12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 그가 모았던 고미술품이 함께 나왔다. 70년 화업을 통째로 훑는 첫 대규모 회고전.
2.전시 기간은 8월 6일부터 11월 8일까지 석 달. 관람료 2,000원에 덕수궁 입장료 1,000원이 따로 붙는다. 월요일 휴관, 수·토는 밤 9시까지. 표 두 장을 합쳐도 3,000원이다.

3.섹션 이름이 특이하다. '배우되 갇히지 않는다', '이어가되 휩쓸리지 않는다', '쌓아 올리니 자유롭다',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넷 다 명사가 아니라 문장이고, 넷을 이으면 그대로 한 사람의 일대기가 된다. 미술관이 대놓고 주장을 건 셈치고는 노골적인 편.
4.그 주장의 내용은 이렇다. 이대원의 환한 화면은 타고난 낙천이 아니라 오래 보고 오래 배워 얻은 결과라는 것. '행복한 화가'라는 별명이 그를 칭찬하면서 동시에 가둬 왔다는 반박이 전시 전체에 깔려 있다.

5.이대원(李大源, 1921~2005)은 미술을 정규로 배운 적이 없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나왔고, 졸업 뒤에는 극동기업이라는 회사를 세워 굴렸다.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세 해 연속 입선했으니 재능이 없어서 미룬 것도 아니다. 첫 개인전이 1957년, 서른여섯 때.

6.그림 자체는 가까이 붙어야 정체가 드러난다. 나뭇잎으로 보이던 덩어리가 코앞에서는 빨강 옆에 초록, 그 옆에 노랑을 찍어 놓은 색점이 된다. 물러서면 다시 나무가 된다. 관람객이 벽 앞에서 두 걸음 다가갔다 두 걸음 물러서기를 반복하게 되는 그림이고, 전시실 네 칸이 그 동작을 감당할 만큼 넓다.
7.여기까지가 화가 이대원이다. 이 전시가 진짜 흥미로워지는 건 그가 화가가 아니었던 시기를 볼 때다. 1959년 8월, 그는 반도화랑의 운영을 맡는다.

8.반도화랑은 1956년 소공동 반도호텔 1층 로비에 생겼다. 만든 쪽은 주한 미군과 외교 사절 부인들의 모임인 서울 아트 소사이어티였고,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가 거들었다. 손님은 외국인, 상품은 한국 그림. 운영이 흔들리자 1958년부터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이 돈을 댔고, 이듬해 이대원이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9.그 가게가 어떤 곳이었냐면, 박수근에게는 유일한 판매처였다. 1960년대 초까지 그의 소품은 20달러, 조금 큰 것도 50달러에 나갔다. 같은 시기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지금 100억 원대에 거래되는 화가가, 반년 치 국민소득을 받고 그림을 넘기던 시절이었다.
1960년의 그림값
10.이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 하나가 1970년에 독립해 현대화랑을 연다. 박명자. 지금의 갤러리현대이고, 한국 화랑 시장에서 가장 큰 축 가운데 하나다. 로비에 차린 가판 하나에서 지금의 유통 구조가 갈라져 나온 것.

11.그러니 이번 전시의 진짜 소재는 한 화가가 아니다. 시장을 만든 사람이 그 시장의 상품이 된 이야기이고, 그런 사례는 어느 업종에서든 흔치 않다. 파는 자리에 서 봤던 사람이 팔리는 자리로 넘어갔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전시는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지만, 연보를 순서대로 읽으면 그 질문이 저절로 선다.
12.돈 이야기를 하자면 미술관 쪽은 벌 생각이 없어 보인다. 표는 2,000원, 24세 미만은 무료, 수·토 저녁 6시부터는 누구나 무료, 매달 마지막 수요일도 무료. 국립미술관의 회수는 티켓이 아니라 예산에서 나오고, 티켓 가격은 문턱을 낮추는 장치로만 쓰인다.
13.대신 값이 움직이는 곳은 밖이다. 이대원의 작품은 최근 5년간 466건이 낙찰돼 79억 원어치가 거래됐다. 한 건당 평균 1,700만 원꼴. 국내 경매시장 전체 낙찰총액은 2023년 1,535억 원에서 2024년 1,150억 원으로 25% 빠졌고, 2025년 상반기는 564억 원이었다. 시장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그의 이름은 거래 건수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시장은 줄고, 이름은 남고
14.그가 평생 그린 소재를 알면 이 전시가 다르게 보인다. 아버지가 아들의 경성제대 입학을 기념해 파주에 사 둔 과수원 1만 5,000평. 1973년 그는 그 땅에 화실을 짓고, 죽을 때까지 거의 매주 그 자리로 갔다. 농원 연작은 남의 풍경이 아니라 자기 땅이었다.

15.이력의 나머지도 한 방향을 가리킨다. 5개 국어를 했고, 박수근과 장욱진, 김환기, 유영국의 작품을 밖으로 실어 날랐다. 1965년부터 홍익대에 나갔고 1967년 교수가 됐다. 초대 미술대학장이 1972년, 총장이 1980년, 예술원 회장이 1989년. 파는 일, 가르치는 일, 제도를 만드는 일을 다 해 본 사람이 마지막까지 붙잡은 자리가 화실이었다.


16.법을 배운 사람이 회사를 세웠다가 서른여섯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마흔 가까이에는 남의 그림을 파는 가게를 맡았다. 그 가게에서 20달러에 팔리던 화가가 지금 100억 원대에 거래된다. 가게 직원이 세운 화랑은 시장의 한 축이 됐고, 정작 주인이던 사람의 그림은 5년에 466번 경매대에 올랐다. 3,000원짜리 표로 볼 수 있는 게 이 순환이다. 파는 쪽과 만드는 쪽을 다 겪어 본 사람은 어느 업종에서든 드물고, 그 경험이 값으로 돌아오는 데는 이 경우 반세기가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