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서울 한남동에서 뉴욕 화랑 한 곳이 다시 문을 연다. 청담동을 접고 옮기면서 전시 면적을 두 배로 키웠다. 그 사이 국내 미술시장 거래액은 2022년 8,066억 원에서 2024년 6,151억 원까지 내려갔다. 개관 이틀 뒤 코엑스에서 프리즈 서울이 열린다. 날짜가 먼저 정해지고 공사가 그 뒤를 따라간 순서.
1.문 여는 날은 8월 31일. 자리는 용산구 한남동 739-28 한남빌딩, 두 개 층. 개관전은 영국 작가 에드 앳킨스(Ed Atkins)의 국내 첫 개인전 《1 day in space》로 10월 31일까지 연다.
2.화랑 이름은 글래드스톤(Gladstone). 바버라 글래드스톤(Barbara Gladstone)이 마흔여섯에 교수직을 접고 1980년 맨해튼에 연 화랑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첼시 두 곳과 어퍼이스트사이드, 브뤼셀, 로마, 서울에 공간을 두고 있고 소속 작가가 70명을 넘는다. 창업자는 2024년 6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울은 그가 마지막으로 연 아시아 거점.
3.서울 지점은 2022년 청담동에서 시작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을 썼고, 개관전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Mineral Mutations》였다. 4년 만의 이사에서 전시 면적이 두 배가 됐다. 설계는 조민석이 이끄는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
4.한남동을 고른 이유는 이웃. 리움미술관이 걸어서 닿고,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과 에스더 쉬퍼(Esther Schipper), 리만머핀(Lehmann Maupin)이 먼저 와 있다. 지난 6월에는 이 일대 화랑 12곳이 '한남 새터데이즈'라는 이름으로 토요일 여는 시간을 서로 맞췄다. 한 곳을 보러 온 손님이 나머지 11곳을 지나가게 만드는 구조. 청담에서는 안 되던 일이다.


5.개관전 한가운데 놓이는 건 신작 영상 《Passive Mech》다. 덴마크 셸란(Sjælland)의 주택 마당에 골판지로 무대 세트를 세우고, 그것이 비바람에 무너지는 동안 1분에 한 프레임씩 한 달을 찍었다. 남은 건 사진 43,200장과 오디오 클립.
6.이런 작업을 거는 방은 창을 막는 데서 시작한다. 빛이 한 줄만 들어와도 검은 화면이 회색으로 뜨고, 옆방 소리가 새면 저음이 뭉개진다. 그래서 조건이 좁아진다. 높은 층고, 완전한 암전, 소리가 새지 않는 벽. 흰 벽 한 겹 둘러 나눈 표준 화랑 평면으로는 이 조건을 못 맞춘다. 두 개 층에 두 배 면적이 그 답이다.
7.설계를 맡은 매스스터디스는 2024년 런던 서펜타인 파빌리온(Serpentine Pavilion)을 지은 사무소. 가운데를 비우고 성격이 다른 덩어리 다섯을 둘러 세운 그 파빌리온처럼, 이 사무소는 빈 자리를 재료로 쓴다. 화랑 두 개 층을 어떻게 갈랐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8.시장은 그동안 줄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 집계에서 국내 미술시장 거래액은 2022년을 꼭짓점으로 2년 동안 23.7%가 빠졌다. 조사는 경기 침체와 고금리를 이유로 든다.
9.지난해에는 6,382억 원으로 3.8% 돌아섰다. 다만 팔린 작품 수는 오히려 줄었고, 평균 거래가격이 1,502만 원까지 올랐다. 작품 수가 아니라 단가가 밀어 올린 한 해.
거래액은 돌아섰고 팔린 작품 수는 줄었다
10.화랑이 돈을 버는 방법은 단순하다. 작가에게 받은 작품을 팔고 그 값을 나눈다. 1차 시장에서 통용되는 배분은 작가와 절반씩. 여기서 임차료와 인건비, 운송과 보험, 아트페어 부스비, 작품 도록 제작비가 빠져나간다. 전시를 한 번 열 때마다 나가는 돈은 확정이고, 들어오는 돈은 확정이 아니다.
11.개관 날짜가 왜 하필 8월 31일일까.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9월 2일 코엑스에서 열린다. 이틀 전에 문을 열고, 그 사이 하루는 작가 토크로 채운다. 9월 1일 저녁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에드 앳킨스가 미디어 작가 김아영, 큐레이터 최장현과 마주 앉는다.
9월 첫 주에 일정이 몰려 있다


12.지난해 프리즈 서울에는 48개국에서 7만 명이 왔다. 표값이 만만치 않은데도. 프리뷰가 25만 원, 나흘 내내 드나드는 인사이더 등급은 75만 원. 이 값을 내고 오는 사람은 구경꾼이 아니라 살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화랑이 노리는 건 코엑스 관람객 7만 명이 아니라 그 안에 섞인 몇백 명.
13.참가 화랑 구성도 바뀌었다. 2024년에는 아시아·태평양에 근거를 둔 곳이 48%였는데 올해는 70%를 넘겼다. 아시아 컬렉터를 만나는 자리로 서울이 굳어졌다는 뜻이고, 서울에 상설 공간을 두는 비용을 감당할 이유이기도 하다. 페이스(Pace)의 한국 관계자는 원화 변동을 상쇄해 달라며 할인을 요구하는 고객이 늘었다고 전한다.

14.청담을 접은 이유는 임차료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동네 모두 서울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든다. 갈린 건 필요한 면적을 한 건물에서 통으로 구할 수 있느냐 하나. 청담 대로변은 명품 매장 규격에 맞춰 잘게 나뉜 상가가 대부분이라 화랑이 필요한 층고와 무주 공간을 이어 붙이기가 어렵다. 한남 쪽은 오래된 근생 건물이 남아 있어 두 개 층을 통으로 쥐는 협상이 성립한다.

15.개관전을 왜 영상 작가로 잡았을까. 영상은 1차 시장에서 가장 안 팔리는 매체다. 에디션을 다섯 개 안팎으로 끊어 미술관과 재단에 넘기는 게 보통이고, 개인 컬렉터 손에 잘 가지 않는다. 여기서 새 공간의 용도가 드러난다. 이 두 개 층은 파는 방이 아니라 다음 작가를 데려올 때 보여 주는 방이다. 화랑이 작가를 놓고 경쟁할 때 결정타는 수수료율이 아니라 어떤 방을 내줄 수 있느냐다.
16.거래액이 2년 만에 24% 가까이 빠진 시장에서 뉴욕 화랑 한 곳이 서울 전시 면적을 두 배로 키웠고, 그 문을 아트페어 개막 이틀 전에 열었다. 지난해 7만 명이 다녀간 나흘에 얹혀 가겠다는 계산이다. 서울에서 이만한 방을 구하려면 높은 층고와 기둥 없는 바닥이 필요하고, 그것도 두 개 층을 한 임대인에게서 통으로 받아야 한다. 그 조건을 갖춘 건물 재고는 도심에 손에 꼽을 만큼만 남아 있다. 자리를 고르는 게 아니라 있는 자리에 맞추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