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를 사는 데 표가 필요해졌다. 9월 2일부터 6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성동구 연무장11길에 한국·일본 문구 브랜드 39곳이 한 건물에 모인다. 입장권 2,900원. 이 자리를 함께 여는 일본 회사는 자기 나라에 매장을 151곳 두고 있는데, 한국에는 한 곳도 없다.
1.이름은 「페이지 투 페이지스(Page to Pages)」. 29CM가 일본 생활잡화 체인 로프트(ロフト)와 손잡고 여는 첫 문구 팝업. 9월 2일 수요일 오후 3시에 열고 6일 일요일 오후 7시에 닫는다.
2.자리는 2호선 성수역 3번 출구에서 걸어 3분, 연무장11길 7번지의 두 개 층이다. 입장권은 29CM 앱에서만 파는데 한 사람이 두 장까지. 표를 오전권과 오후권으로 갈라 시간대별로 사람을 나눠 받는다.

3.로프트는 1987년 시부야에서 시작한 생활잡화점이다. 지금 일본 안에 직영 매장이 151곳 있고, 밖으로 나간 것은 중국과 태국의 여덟 곳뿐. 한국 매장은 없다. 한국인이 로프트에서 문구를 사려면 지금까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4.붙은 브랜드는 39곳. 일본에서 29곳, 국내에서 10여 곳. 호보니치(ほぼ日)·코쿠요(コクヨ)·MIDORI·RHODIA·FILOFAX·ASHFORD·mt처럼 국내 유통이 얇았던 이름이 1층에 늘어서고, 2층에는 오이뮤·소소문구·코우너스·모스가 들어간다.

5.2층이 이 팝업에서 제 몫을 하는 자리다. Hinine Note는 한 권 45,000원짜리 커스텀 노트를 그 자리에서 묶어 주고, 5만 원 넘게 산 사람에게는 표지에 이름을 새겨 준다. 코팅 책갈피를 만드는 자리와 메시지를 띄우는 화면도 같은 층. 사서 나가는 동선이 아니라 머무는 동선.


6.값이 만만한 동네는 아니다. 성수역 일대 팝업 대관료는 165㎡ 안팎이 하루 300만 원대에서 시작하고, 330㎡급이면 하루 1,000만 원을 넘긴다. 대관은 임대차가 아니라서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증액 상한이 걸리지 않는다. 값을 정하는 쪽은 건물주 혼자.

7.문구점은 눈보다 손이 먼저 가는 가게다. 표지를 손톱으로 눌러 종이 두께를 재고, 만년필 촉을 종이에 대 획이 번지는지 본다. 마스킹테이프는 반 바퀴 풀어야 무늬가 어디서 되풀이되는지 안다. 이 세 동작이 화면에서는 하나도 되지 않는다. 온라인 편집숍이 닷새 동안 진짜 가게를 빌린 이유.


8.2,900원은 무엇을 받는 값인가. 닷새치 표를 다 팔아도 표값 합계는 대관료 한 항목을 못 덮는다. 이건 매출이 아니라 인원을 자르는 장치다.
매장이 151곳인 나라와 한 곳도 없는 나라
9.실제 회수는 계산대에서 난다. 문구는 단가가 낮은 물건이라 3,000원짜리 마스킹테이프를 열 개 담아도 3만 원. 그래서 각인 서비스에 5만 원이라는 문턱이 걸려 있다. 객단가를 그 위로 밀어 올리려고 세운 선.

10.두 번째 기둥은 브랜드 39곳에서 받는 참가비와 위탁 수수료. 참가비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편집 행사에서 부스 한 자리에 수백만 원이 통상이니, 39곳이면 이 항목만으로 대관료를 상쇄한다. 추정이다.
11.가장 큰 항목은 회원이다. 표를 29CM 앱에서만 팔면 들어온 사람 전원이 앱 이용자가 되고, 방문 시간대와 산 브랜드와 결제액이 계정에 붙어 남는다. 이 기록은 팝업이 끝난 뒤에도 계속 쓰인다. 29CM의 지난해 거래액이 1조 3천억 원. 문구는 그 안에서 사람을 가장 싸게 데려오는 상품이다.
표값으로는 자리값을 못 낸다
12.문구가 팔리는 이유는 문구가 아니다. 다이어리를 꾸미고 필사를 하고 하루를 기록하는 취미가 먼저 있고, 그 취미의 준비물이 문구다. 예스24 집계에서 다이어리 꾸미기 관련 문구 판매량이 한 해 61.9% 늘었다. 취미는 소모품을 쓰고, 소모품은 다시 사야 한다.

13.여행이 그다음. 지난해 일본에 간 한국인이 945만 9,600명, 나라별 1위였다. 로프트는 그 여정의 고정 코스 가운데 하나이고, 돌아온 사람은 다음 여행 전까지 그 물건을 못 산다. 닷새짜리 매장이 메우는 자리가 바로 그 사이.

14.29CM가 문구로 판을 벌인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4월 코엑스에서 연 인벤타리오(Inventario) 문구 페어에 브랜드 69곳이 들어왔고 닷새 동안 2만 5천 명이 다녀갔다. 첫날 문구 거래액이 전년의 네 배였다고 회사는 밝힌다.

15.코엑스 전시홀에서 닷새를 열던 회사가 올해는 상가 두 개 층으로 내려왔다. 크기를 줄인 대신 자리를 옮겼고, 그사이 상설 편집숍 이구홈 성수를 열어 넉 달 만에 누적 40만 명을 채웠다고 밝혔다. 페어는 1년에 한 번이지만 매장은 매일 연다. 팝업은 이제 행사가 아니라 상설 매장으로 사람을 미는 깔때기다.
16.닷새 뒤 이 가게는 사라진다. 남는 건 계산대 기록과 그게 붙은 앱 계정이고, 브랜드 39곳을 계정 하나 아래 묶은 것이 이 팝업이 실제로 판 물건이다. 같은 걸 벌일 때 먼저 걸리는 건 물건이 아니라 날짜다. 닷새를 팔려면 셋업과 철거로 사흘을 더 빌려야 하고, 그러면 임차는 여드레인데 매출이 서는 날은 닷새. 그 사흘치를 객단가로 못 넘기면 홍보비로 끝나고, 넘기면 상설 매장을 여는 근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