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용산에서 문을 연 전시에 벽 그림 13점이 들어왔다. 들어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상자에 담겨 온 것은 종이 한 벌이고, 그림은 이 미술관 벽에서 처음 생겼으며, 회기가 끝나면 흰 페인트 아래로 사라진다. 그린 사람도 작가가 아니다.
1.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지난 화요일 《Sol LeWitt: Open Structure》를 열었다. 2027년 2월 28일까지 여섯 달을 간다. 자리는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지하 전시실이고,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
2.출품작은 45점이고 그중 13점이 월 드로잉(Wall Drawing)이다. 나머지는 구조물과 회화, 사진과 판화, 그리고 작가가 만든 책과 기록물. 성인 관람료 18,000원, 월요일은 쉰다. 해설은 미술관 앱으로 무료 제공한다고 안내한다.

3.월 드로잉이 여기 온 방식이 이 전시의 전부다. 미술품 운송 상자에 담겨 건너온 게 아니다. 온 것은 작가가 쓴 지시문과 도면 한 벌이고, 실물은 이 미술관 벽에서 처음 생겼다. 르윗은 1968년부터 이 방식으로 작업했고, 그의 이름으로 실행된 월 드로잉이 1,300점을 넘는다고 도쿄 쪽 전시 설명에 적혀 있다.

4.벽 그림에는 액자가 없다. 파란 바탕이 벽 끝까지 가고 그 위로 붉은색과 노란색, 초록과 주황의 삼각형이 부챗살처럼 열린다. 다른 방에서는 검은 벽에 흰 선이 원과 사각형, 삼각형을 겹쳐 놓았다. 그림과 벽 사이에 틈이 없으니, 관람객이 서는 자리는 그림 앞이 아니라 그림이 칠해진 방 안.

5.그린 사람은 APMA MAKERS라는 이름으로 모인 국내 대학과 대학원의 미술 실기 전공자 23명. 재단 쪽 실행자와 함께 지시문을 읽고, 선을 긋고, 색을 겹쳐 올렸다. 한 점에 며칠씩.

6.그럼 이걸 산 사람은 무엇을 가진 걸까. 월 드로잉을 사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증서와 지시문. 벽에 그려진 실물은 회기가 끝나면 덧칠해 지우고, 다음 소장처에서 같은 종이를 펴 다시 그린다. 작품은 벽이 아니라 종이에 있다.

7.그러니 작가가 2007년에 죽은 뒤로도 그의 새 그림이 계속 나온다. 지난달 용산 지하에서 칠해진 13점은 전부 올해 만들어진 물건이면서 동시에 전부 진품이다. 위작 시비가 붙을 자리도 없다. 조건은 지시문을 가졌느냐 하나.

8.시장은 이 구조를 진작에 값으로 받아들였다. Wall Drawing #767이 2001년 Christie's 뉴욕에서 35,250달러에 팔렸고, Wall Drawing #41은 2009년 Phillips 뉴욕에서 254,500달러에 넘어갔다. 벽을 뜯어 온 게 아니라 증서를 사고판 값.
9.도쿄와 나란히 놓으면 이 전시의 계산이 드러난다. 같은 순회전이 지난해 12월 도쿄도현대미술관(東京都現代美術館)에서 먼저 열려 다음 달 초에 닫는다. 거기 칠한 월 드로잉은 6점, 여기는 13점.
같은 전시, 두 도시
10.관람료는 도쿄가 일반 1,600엔, 서울이 18,000원. 환율로 옮기면 서울이 2천 원 남짓 비싸다. 도쿄 쪽은 도의 예산이 들어가는 공립관이고 이쪽은 회사가 세운 미술관이니, 애초에 요금표를 만드는 손이 다르다.

11.회기는 더 크게 갈린다. 도쿄가 99일이고 서울은 181일. 휴관일을 빼고 실제로 문 여는 날만 세면 서울이 150일 안팎. 벽 그림을 두 배 넘게 칠했으니 회기도 그만큼.
12.하루 500명으로 잡으면 여섯 달에 7만 5천 명이 지나간다. 성인 요금으로만 세도 표값이 13억 원을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추정이고, 예약제라 하루 정원도 관람객 수도 공개돼 있지 않다.
회기를 늘리면 표값이 어떻게 되나
13.여섯 달을 한 전시에 내줄 수 있는 이유는 건물에 있다. 이 미술관은 회사 본사 지하에 있고 임대료를 밖으로 내지 않는다. 남의 건물을 빌려 전시를 파는 기획사라면 반년짜리 회기를 짜는 선택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14.인건비도 자리를 옮겼다. 재단이 인증한 실행자를 통째로 데려오는 대신 미술 전공 학생들을 프로그램으로 묶어 함께 그렸고, 참여자는 이력을 얻고 미술관은 손을 얻는다. 원가를 깎으려고 짜낸 방법이 아니라 이 작품이 원래 굴러가는 방식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벽을 칠할 손을 교육 프로그램에서 구한 것이 된다.

15.용산 지하에서 여섯 달 동안 45점을 볼 수 있고, 그중 13점은 2027년 3월이면 흰 페인트 아래로 사라진다고 한다. 하루 500명으로 잡으면 표값이 13억 원을 넘는데 그 돈은 사람이 몰려서가 아니라 회기가 길어서 생긴다. 국내에서 같은 걸 하려 할 때 먼저 걸리는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반년을 한 콘텐츠에 내주려면 그 공간이 자기 것이어야 하고, 빌린 자리에서는 석 달이 한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