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는 10년 넘게 서랍에 있었고, 나랏돈 15억 원을 받기로 하고도 나머지를 댈 투자사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영화가 지난 토요일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았다. 9월 23일 일부 극장에 먼저 걸리고, 44일 뒤 넷플릭스로 간다.
1.지난 토요일 밤, 베니스국제영화제(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폐막식에서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트로피 이름은 은사자상. 경쟁부문에서 황금사자상 바로 다음 자리. 이 감독이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든 건 「오아시스」로 감독상을 받은 2002년 이후 24년 만이고,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기도 하다.

2.개봉은 9월 23일. 추석 연휴 하루 전이다. 포스터 맨 아래에는 「일부 극장에서」라는 말이 붙었다. 극장에서 먼저 틀고 11월 6일에 넷플릭스로 넘어가는 순서이고, 러닝타임 164분에 청소년 관람불가. 제작비를 댄 곳은 한국 투자사가 아니라 넷플릭스다.

3.이야기는 두 부부가 만나며 시작한다. 대기업에서 정리해고된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그리고 이 부부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려는 감독 예지(조여정)와 사업가 남편 상우(조인성).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만난 두 집이 서로의 살림을 들여다보며 각자 숨겨 둔 욕망과 마주한다. 전도연은 이 감독의 「밀양」으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설경구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의 주인공.


4.공개된 스틸 가운데 한 장이 이 관계를 한 화면에 담았다. 해 질 녘 마당, 징검돌 옆 나무 의자에 미옥이 앉아 있고 삼각대 위 카메라와 둥근 금색 반사판이 그쪽을 겨눈다. 반사판이 모은 빛은 앉은 사람 얼굴에만 떨어지고, 대문 앞의 남자는 한 발 떨어져 그 장면을 본다. 찍는 쪽과 찍히는 쪽이 한 마당에 있는데 빛은 한 사람에게만 간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의 삶을 작품 재료로 쓰는 이 관계가 영화 내내 조금씩 뒤틀린다.

5.시나리오는 10년 넘게 서랍 속에 있었다. 2025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중예산 한국영화 제작지원 사업에 뽑혀 15억 원을 받기로 했지만, 나머지 제작비를 댈 투자사가 나서지 않았다. 올해 초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을 대겠다고 했고, 이 감독과 제작사 파인하우스필름은 영진위 지원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넷플릭스는 극장 개봉과 연출 독립을 약속했다. 이 감독은 제작 내내 간섭이나 요구가 없었다며,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편하게 일했다고 말했다.

6.베니스 첫 상영은 9월 6일이었고, 상영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6분 이어졌다. 영화 평론 집계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평론가 신선도는 9월 중순 현재 100%. 외신 평이 공통으로 짚은 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버티는가. TIME의 평론가 스테퍼니 재커렉(Stephanie Zacharek)은 이 영화를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법을 궁리하는 이야기라고 썼다.

7.해고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이야기. 구조조정 소식이 끊이지 않는 시절이라 관객은 호석의 우울을 남 일로 보지 않는다. 여기에 카메라가 한 겹 더 얹힌다. TIME은 호석이 마침내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두고,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의 윤리를 묻는 장면이라고 전했다. 남의 불행이 영상이 되어 올라오는 걸 관객은 매일 휴대폰으로 본다. 그 불편함을 영화가 먼저 꺼낸다.
8.배우 쪽 셈법에도 약점이 없어 보인다. 전도연과 조인성은 2002년 드라마 「별을 쏘다」 이후 24년 만에 한 화면에 섰고, 조여정은 「기생충」으로 해외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네 주연이 모두 흥행 이력이 있는 배우. 그런데도 국내 투자사는 왜 이 영화를 거절했을까.

9.답은 전작의 장부에 있다. 「버닝」은 칸 경쟁부문에 올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았지만, 국내 관객은 52만8,626명에서 멈췄다. 제작비 80억 원을 들인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250만 명이었다. 상은 칸에서 받았는데, 극장에서는 본전의 5분의 1 남짓만 돌아왔다.

10.이번 영화는 얼마짜리일까. 영진위 공고에서 거꾸로 짐작할 수 있다. 지원금은 순제작비의 30%를 넘지 못하게 돼 있어서, 15억 원을 받기로 한 영화라면 순제작비가 50억 원은 된다. 그 위에 마케팅비까지. 극장 표 하나로 이 돈을 건지려면 관객이 「버닝」의 몇 배는 들어야 한다.
11.지난해 극장 관객이 표 한 장에 낸 돈은 평균 9,870원꼴이다. 부가세를 떼고 극장과 나누면 영화 쪽에 오는 몫은 4,900원 남짓(추정). 「버닝」만큼 들면 26억 원 안팎. 러닝타임도 극장 편이 아니다. 164분짜리는 한 관에서 하루에 돌리는 회차가 보통 영화보다 한두 번 적다.
표 한 장 9,870원이 갈리는 길
12.넷플릭스는 이 계산을 하지 않는다. 업계에 알려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계약은 제작비에 일정 비율을 얹어 주고 권리를 통째로 가져가는 방식이고, 이 영화의 계약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돈은 표가 아니라 구독료로 돌아오며, 한 편의 값은 가입자를 붙잡아 두는 힘으로 잰다. 넷플릭스가 약속한 한국 콘텐츠 투자는 4년간 25억 달러. 지난해 한국영화 극장 매출이 1년 새 39.4% 줄어드는 동안, 투자사들이 비운 자리에 이 돈이 들어왔다.
13.극장에 먼저 거는 데도 이유가 있다. 오스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가 되려면 자국 극장에서 7일 이상 연달아 상영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이미 한국 출품작으로 뽑혔다. 넷플릭스는 10월 23일 미국과 영국, 일본 극장에도 먼저 건다. 옛 영화도 함께 움직였다. 「초록물고기」와 「밀양」이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먼저 올라왔고, 「박하사탕」과 「오아시스」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뒤를 이었다. 「시」와 「버닝」은 미국과 일본 차례. 신작 한 편이 서랍 속 옛 영화 여섯 편의 값을 다시 매긴다.
극장에 먼저 준 44일
14.넷플릭스가 한국 영화에 처음 돈을 댄 건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옥자」다. 극장과 넷플릭스에 같은 날 공개하겠다고 하자 멀티플렉스 3사가 상영을 거부했고, 「옥자」는 단관 극장과 작은 체인에서만 걸렸다. 이번에는 넷플릭스가 극장에 44일을 먼저 내준다.
15.국회에는 극장 상영이 끝나고 6개월이 지나야 OTT에 영화를 넘길 수 있게 하는 영화비디오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극장을 지키자는 법인데, 예외 없이 일률로 통과되면 극장에 먼저 건 넷플릭스 영화도 종영 뒤 반년을 기다려야 한다. 11월 공개를 잡아 둔 플랫폼이 고를 길은 극장을 건너뛰는 쪽. 「옥자」 때처럼.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 581명은 투자금 회수가 늦어진다며 지난 4월 철회를 요구했다.
16.국내 투자사는 250만 명이라는 손익분기점 앞에서 멈췄고, 넷플릭스는 같은 영화를 극장 44일과 오스카 출품 자격, 옛 영화 여섯 편의 새 판로로 계산했다. 국내에서 50억 원대 작가 영화를 다시 극장용으로 만들려 할 때 먼저 걸리는 건 극장 수입 하나로 본전을 따지는 투자 계약이다. 해외 판매와 스트리밍 판권을 개봉 전에 묶어 둘 길이 없으면, 다음 시나리오도 넷플릭스로 가거나 서랍으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