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산공원 뒷골목에 투명한 공기주머니를 두른 건물이 섰다. 여섯 개 층 290평에 옷을 거는 층은 절반뿐이고, 건물을 올린 쪽은 브랜드를 소유한 회사가 아니라 그 이름을 빌려 쓰는 회사다. 옷을 팔아서는 맞추기 어려운 임대료를 감당하는 계산을 따라가 본다.
1.9월 10일 문을 열었다.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 지하 1층부터 5층 루프톱까지 여섯 개 층에 약 960㎡, 290평.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이 운영하는 「헬리녹스 웨어(Helinox Wear)」의 첫 단독 매장. 브랜드가 세상에 나온 지 열한 달 만에 생긴 여섯 번째 오프라인 자리이고, 앞선 다섯 곳은 모두 남의 건물 안 매대였다.
2.강남과 잠실의 대형 몰 안에 다섯 자리, 이번에 노면 건물 한 채. 헬리녹스 웨어는 지난해 10월 2025 가을·겨울 시즌으로 시작했고, 이번 시즌 상품 가짓수를 약 60종에서 80종으로 늘렸다. 첫 시즌 한 달 만에 다 팔린 「이클립스 팩 다운 재킷」은 올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최고상을 받았는데, L 사이즈 무게가 320g이고 800필파워 구스다운이 들어간다.

3.전면에 붙은 것은 ETFE 에어쿠션. 불소수지 계열 투명 필름을 여러 겹 겹치고 안에 공기를 넣어 부풀린 자재로, 텐트의 플라이시트에서 모양을 따왔다고 한다. 회사는 공간 개념을 「소프트 스트럭처(Soft Structure)」라 불렀다. 빔이나 파이프처럼 무겁고 단단한 재료 대신 선과 면, 공기로 구조를 만든다는 뜻이고, 초경량 텐트 폴을 만들던 회사의 기술을 건물 한 채 크기로 키운 것.
4.안으로 들어가면 층마다 쓰임이 갈린다. 지하 1층은 기어와 옷을 함께 늘어놓은 열린 매장, 1층은 주력 상품과 큰 구조물, 미디어월, 2층은 터널 모양으로 짠 전시 공간. 3층부터는 성격이 바뀐다. 카페와 테라스가 3층, 프라이빗 라운지가 4층, 루프톱이 5층. 여섯 개 층 가운데 옷을 파는 층은 셋이고 나머지 셋은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290평을 여섯 층으로 나눈 방식

5.1층 벽을 따라가면 구조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옷걸이 봉이 파란 금속 한 줄로 지나가고 거기 다운 재킷이 간격을 두고 걸린다. 맞은편 벽 전체가 화면이라 산과 사람이 흐르고, 바닥은 흰색에 잔무늬. 2층 설치물은 금속 링을 겹쳐 만든 구체인데 발밑에 마른 잎을 깔아 두었다. 옷을 빽빽이 거는 대신 한 벌씩 띄워 세우는 배치. 같은 면적에 걸리는 수량은 그만큼 준다.


6.여기서 계산이 갈린다. 옷 가게의 면적당 매출은 걸리는 수량과 회전율이 정하는데, 290평 중 절반을 카페와 라운지, 루프톱에 내주고 나머지 절반도 성기게 걸면 그 수치는 백화점 매대보다 낮아진다. 판매만 생각하면 손해 보는 배치. 그런데 이 건물을 올린 쪽은 애초에 판매로 회수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7.헬리녹스는 옷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2024년 10월 코오롱FnC와 의류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고, 코오롱이 1년을 준비해 지난해 10월 헬리녹스 웨어를 내놓았다. 브랜드 이름은 헬리녹스의 것, 옷을 기획하고 만들고 파는 주체는 코오롱. 그러니까 도산의 290평은 브랜드 소유자가 아니라 이름을 빌려 쓰는 쪽이 자기 돈으로 세운 건물이다.

8.같은 달, 브랜드 소유자는 다른 문을 열었다. 9월 4일 신세계사이먼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에 다섯 번째 직영점 「HCC 파주」가 들어갔다. 서울·부산·제주·여주에 이어 아울렛으로는 두 번째. 개점 기념으로 일부 상품을 최대 40%, 의류와 모자를 20% 깎아 팔았다. 엿새 차이로 본체는 아울렛 매대에 들어가고, 이름을 빌린 쪽은 도산에 건물 한 채를 세웠다.
9.임대료를 보면 이 배치가 더 선명해진다. 올해 7월 조사에서 도산공원 상권의 1층 평균 임대료는 3.3㎡당 46만 원, 입지에 따라 20만 원대부터 110만 원대까지 벌어졌다. A급 자리는 바닥 권리금만 5억 원까지. 땅값은 4년 새 69% 올랐다고 한다.
290평에 붙는 월 임대료 (추정)
10.가운뎃줄로 잡아 월 1억 3,000만 원이라 치자. 25만 원짜리 이클립스 팩 윈드쉘로 환산하면 한 달에 534장, 하루 18장을 팔아야 임대료만 맞는다. 옷 장사에서 임대료가 매출의 10% 안쪽이어야 남는다는 통념을 대면 월 매출 13억 원, 하루 180장 언저리. 290평 노면 매장에서 하루 180장은 쉬운 숫자가 아니다.

11.그래서 이 건물의 고객은 국내 구매자만이 아니다. 코오롱FnC는 10월 상하이(上海)에 팝업 매장을 내고 수요를 살핀 뒤 12월 정식 매장을 연다고 밝혔다. 기존 매장 가운데 코엑스몰 자리는 손님의 25% 이상이 외국인이고, 헬리녹스의 샤오훙수(小红书) 계정 팔로워는 9월 초 6만 명을 넘겼다. 도산의 290평은 한국 손님에게 옷을 파는 매장이기 전에 상하이로 들고 갈 사진을 찍는 자리.

12.파사드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보면 노림수가 보인다. ETFE 쿠션을 세계에 알린 건물은 2005년 뮌헨에 선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이고, 설계는 헤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 붙은 쿠션은 2,784장이었다. 3년 뒤 베이징 국가수영센터가 같은 재료로 물방울 외피를 만들었다. 경기장 크기에서나 값이 나오던 자재를 노면 상가 한 채에 끌어내린 것이고, 그렇게 되면 건물 자체가 촬영용 배경.


13.중국 이야기는 이미 한 번 검증됐다. 코오롱은 2017년 중국 안타스포츠(安踏体育)와 50 대 50으로 코오롱스포츠 차이나를 세웠고, 이 법인 매출은 최근 한 해에 84% 늘어 2,000억 원 선에 닿았다. 그 경험을 옆에 두고 올해 1월 코오롱FnC와 헬리녹스가 중국 합작법인을 따로 세우기로 했다. 코오롱이 이미 중국 내 헬리녹스 캠핑용품 판권을 쥐고 있었으니, 장비와 옷을 한 법인에 모으는 정리에 가깝다.
14.라이선스 사업의 오래된 셈법이 여기 다 들어 있다. 이름값은 빌려주는 쪽이 챙기고, 그 이름을 키우는 비용은 빌린 쪽이 댄다. 코오롱FnC의 올 상반기 매출은 6,005억 원, 영업이익은 208억 원으로 한 해 전보다 116.7% 늘었다. 이익이 두 배로 뛴 해에 도산에 건물을 세운 것은 돈이 남아서가 아니라, 라이선스 계약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 계약 기간 안에 중국까지 가야 한다.
15.텐트 폴을 만들던 회사의 이름을 빌려 옷을 짓는 회사가, 그 이름의 얼굴이 될 건물을 도산공원 뒷골목에 세웠다. 여섯 개 층 290평에 옷을 파는 층은 셋뿐이고 월 임대료는 억 단위로 추정된다. 브랜드를 빌려 쓰는 쪽이 이런 건물을 지을 때 국내에서 먼저 막히는 건 계약서다. 이름을 빌리는 기간은 보통 몇 년 단위인데 건물 임차는 그보다 길게 묶이고, 인테리어 감가상각은 그 사이 어디쯤에 걸린다. 계약이 끝나면 간판은 떼어 가도 벽은 남는데, 그 벽값을 누가 무는지까지 적어 둔 계약서는 흔치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