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고에서 막 꺼낸 유리잔에 우유를 부으면 잔 벽을 따라 우유가 언다. 그 위로 짧게 뽑은 에스프레소를 떨어뜨린다. 멜버른 도심 뒷골목의 16석 카페 Regulars는 2025년 12월 말 문을 열고 3주 만에 이 한 잔을 하루 600잔 넘게 팔았다. 유리잔 18개로 시작했다가 일주일 만에 200개를 더 주문했다. 이 가게의 하루 판매량을 정하는 건 바리스타의 손이 아니라, 영하 85도 냉동고에 한 번에 들어가는 잔의 수다.
1.주소는 리틀 라트로브 스트리트(Little La Trobe Street) 38-40번지 1층이고, 매일 오전 9시에 열어 오후 4시에 닫는다. 벽돌 외벽을 통째로 주황색으로 칠하고 검은 캐릭터 그림 옆에 가게 이름을 크게 적었다. 안쪽 좌석은 16개. 가게 앞 인도에는 주황색 플라스틱 상자를 엎어 두었고, 손님들이 그 위에 걸터앉는다.
2.운영은 에디 판(Eddy Pan)과 프렘 판(Prem Pan) 부부가 한다. 에디는 2016년 태국 바리스타 챔피언이 되어 그해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orld Barista Championship)에서 41위를 했다. 멜버른 로스터리 St Ali에서 7년 동안 헤드 로스터로 일했고 Q 그레이더 자격이 있다. 원두는 동쪽 교외 볼윈(Balwyn)의 작업장에서 직접 볶는다. 간판과 실내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프렘의 몫. 에디는 일본의 작은 카페처럼 조용히 머무는 뒷골목 가게를 떠올렸다고 말하는데, 문을 연 지 3주 만에 가게 앞 줄이 골목을 따라 늘어섰다.

3.잔은 냉동고를 두 번 거친다. 먼저 영하 20도에서 식혀 온도 차에 잔이 깨지는 걸 막고, 그다음 영하 85도 냉동고로 옮긴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리스타가 금속 집게로 잔을 꺼내 바닐라 빈을 우린 우유를 붓는다. 우유는 St David Dairy의 균질화하지 않은 전지유. 잔 벽에 닿은 우유는 곧바로 얼고 가운데는 액체로 남으며, 그 위에 리스트레토를 올리면 끝. 얼음도 스팀도 쓰지 않는다.

4.서리가 앉은 잔을 쥐면 손끝부터 시리다. 에스프레소는 잔 벽에 붙은 얇은 얼음 우유 틈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갈색이 흰 층을 따라 번진다. Broadsheet의 표현을 빌리면 아이스크림 같은데도 쉽게 넘어가는 잔. 상하이의 원조 매장은 우유를 부은 뒤 30~40초 안에 마시라고 안내하고, 흔들거나 저어 주거나 포장해 주지 않는다. 잔 하나가 1분을 못 간다.
5.원두는 브라질과 콜롬비아 블렌드이고 컵노트는 견과, 초콜릿, 크림. 음료가 차가우면 혀는 단맛과 향을 덜 느낀다. 산미가 밝은 원두 대신 고소한 쪽을 고르고 우유에 바닐라 빈을 미리 우려 단맛을 채운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균질화하지 않은 우유는 지방 알갱이가 커서 크림이 위로 뜨고, 혀에 닿는 질감이 두껍다.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닿으면 잔은 금세 온도를 되찾고, 얼었던 벽도 녹아 우유가 묽어진다.
6.실내는 프렘이 꾸민 미드센추리 북유럽풍. 원목 판재를 댄 벽에 액자 몇 점을 걸고 둥근 조명을 달았다. 바는 입구 쪽에 길게 놓였고 그 뒤 벽에 그라인더 세 대가 나란히 선다. 좌석이 16개뿐이라 손님 상당수는 바 앞에 서서 마시거나 인도의 상자에 앉는다. 1분 안에 비워야 할 잔을 들고 오래 앉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


7.멜버른은 뜨거운 우유로 만드는 플랫 화이트의 도시다. 이 잔은 집에서도 옆 가게에서도 못 만든다. 실험실에서 시료를 보관할 때 쓰는 초저온 냉동고가 있어야 하기 때문. 1분 안에 마셔야 하니 손님은 가게 앞에서 잔을 비우고, 인도에 늘어선 사람과 서리 낀 잔이 그대로 틱톡 영상이 된다. 줄이 곧 광고.

8.이 잔은 상하이에서 먼저 줄을 세웠다. 2025년 6월 20일 상하이 융캉루(永康路)에 싼리팡(三立方)이 독일 그라인더 회사 Mahlkönig와 이름을 나란히 건 더티 전문점을 열었다. 한 잔 26위안, 약 4,900원. 현지 매체들은 평일 500잔, 휴일 800잔이 나가고 폭우 속에서도 줄이 섰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의 Slow Boat는 하루 100잔으로 묶어 팔고, 줄을 선 손님의 대기는 두 시간.

9.가게 이름부터 Regulars, 우리말로 단골이다. 벽의 포스터에는 좋은 커피와 좋은 사람(Good coffee and company)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틱톡을 보고 찾아온 처음 보는 손님들로 줄이 섰다. 그 줄을 단골로 바꾸는 일은 더티가 아닌 메뉴가 맡는다. 18시간 우린 콜드브루에 레드커런트·포도·패션프루트 시럽을 넣은 잔, 에티오피아 콜드브루에 포멜로 시럽을 더한 Pomelo Sunrise, 피스타치오나 딸기·링곤베리 시럽을 곁들인 말차까지. 시럽과 거품은 가게에서 만들고, 빵은 Tori's에서 받는다.


10.메뉴판 가격은 확인하지 못했다. 멜버른 도심 스페셜티 카페 라테가 6호주달러 안팎이고 Slow Boat가 10싱가포르달러쯤 받는 걸 보면, 더티 한 잔을 8.5호주달러로 잡는다(추정). 그러면 더티 한 메뉴로 하루 5,100호주달러, 약 460만 원. 30일이면 약 1억 3,800만 원.
11.재료비는 가볍다. 리스트레토에 원두 20g, 우유 180㎖에 바닐라를 더하고 세척과 파손을 얹어도 한 잔에 1.25호주달러 안팎, 가격의 15%쯤으로 추정한다. 종이컵과 뚜껑 값이 빠진 자리에 깨지는 유리잔 값이 들어간다. 돈이 무겁게 들어가는 쪽은 장비. 실험실용 초저온 냉동고는 새것이 대당 1만 5,000~3만 호주달러 선이고(추정), Melbourne Food and Wine Festival은 이 가게 냉동고를 두고 괴물 같은 크기라고 적었다.
12.하루 7시간에 600잔이면 42초에 한 잔. 잔 218개로 600잔을 내려면 잔 하나가 하루 2.8번 돌아야 한다. 손님이 비운 잔을 씻고 말려 영하 20도를 거친 뒤 다시 영하 85도까지 식히는 한 바퀴를 평균 2시간 반 안에 마쳐야 한다. 이 가게의 판매량 상한은 좌석 16개가 아니라 냉동고 칸 수와 잔이 식는 시간에 달렸다. 상하이 원조 매장 점장도 냉동고를 몇 차례 더 큰 것으로 바꿨고 또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13.이 잔의 원형은 도쿄 시모키타자와(下北沢)의 Bear Pond Espresso에 있다. 일본과 뉴욕의 광고회사, FedEx에서 일하다 18개월 바리스타 교육을 거친 다나카 가쓰유키(田中勝幸)가 2009년 옛 과자 가게를 고쳐 연 곳. 이듬해 블로그 방문기에 이미 「더티」가 나온다. 차갑게 식힌 우유 위에 리스트레토를 부은 잔으로, 냉동고 대신 바리스타의 손과 우유 온도로 만들었다. 15년 뒤 상하이가 그 잔에 실험실 냉동고를 붙였다.
14.냉동고는 돈이면 산다. 상하이 가게가 뜬 뒤 한 달이 안 돼 청두(成都)·난징(南京)·다롄(大连)·쿤밍(昆明)에 비슷한 잔이 나왔고, 다롄의 한 가게는 영하 196도 액체질소를 들고 나왔다. 경쟁이 온도 숫자로 옮겨 가면 맛은 뒤로 밀린다. 에디는 멜버른에서 이 원두를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고 말한다. 냉동고는 옆 골목 카페도 들이지만, 볼윈에서 볶은 원두는 거기서 못 산다.
15.뒷골목의 16석 카페가 영하 85도 냉동고와 유리잔 218개로 하루 600잔을 팔았다. 국내에서 먼저 걸리는 건 이름. 2018년 서울에서 「더티커피」는 크림을 잔 밖으로 넘치게 담고 코코아 가루를 뿌린 잔을 뜻했고, 용산구 용문동의 카페 브랑쿠시가 그 이름을 퍼뜨렸다. 한 번 지나간 유행의 이름이라, 같은 이름을 걸면 손님은 새 잔이 아니라 8년 전 잔을 떠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