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난징서로(南京西路)의 럭셔리 몰 Plaza 66(恒隆广场). 이탈리아 모자 회사 보르살리노(Borsalino)가 8월 25일 여기에 대중화권 첫 상설 매장을 열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이 몰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다. 넉 달 전인 4월, 같은 건물 한가운데 유리 상자를 세워 기간 한정으로 팔아 봤고, 그 자리를 상설로 바꾼 것이 이번 개점이다. 1857년에 시작해 2017년에 한 번 파산했던 회사가 중국에 들어오는 데 고른 순서다.
1.개점일 아트리움에 사람이 찼다. 흰 파빌리온 앞에서 리본을 끊었고,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와 몰 운영사 사람들이 나란히 선 자리. 파트너는 중국 유통사 Essence Group. 보르살리노가 물건을 직접 파는 자리가 대중화권에서는 이번이 처음이고, 그전까지는 남의 매장 안 매대로만 들어가 있었다.
2.파빌리온은 이탈리아 건물 파사드를 축소해 세운 모양이다. 크림색 벽에 아치 창을 파고 연보라 유리를 끼운 뒤, 지붕 자리에 흰 페도라를 실물의 몇십 배로 얹었다. 위층 난간마다 흑백 인물 사진 배너를 세로로 걸어 아트리움 전체를 한 브랜드로 덮은 것. 몰 위층 전부가 한 방향을 보게 만든 배치.

3.4월 팝업은 생김새가 달랐다. 검은 금속 프레임에 유리를 끼운 타원형 상자를 아트리움 바닥에 놓고 바닥 테두리를 황동으로 둘렀다. 안쪽 벽은 연분홍 타일에 붉은 줄눈. 벽 한가운데 황동 테를 두른 타원 거울. 거기에 브랜드 필기체를 새겼다.

4.모자를 파는 매장은 진열 방식이 옷 가게와 다르다. 챙을 겹쳐 위로 쌓는다. 같은 모델을 색만 바꿔 네댓 개 포개면 챙 테두리가 층을 이루고 안감의 검은 띠에 박힌 금색 필기체가 옆면으로 죽 늘어선다. 벽 진열장 아래에는 길게 놓은 붉은 가죽 벤치. 써 보는 데 시간이 걸리는 물건이라 앉을 자리를 먼저 만든 것.


5.파는 물건 하나에 7주가 걸린다. 토끼털을 펠트로 눌러 만드는 공정이 50단계 안팎. 그 대부분이 사람 손이다.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공장에서 1년에 30만 개. 미국 공식 매장 기준으로 토끼털 펠트 모자가 400달러대 중반이고, 비버털을 쓰면 975달러까지 올라간다고 안내한다.

6.모자가 온라인으로 잘 안 팔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머리 둘레가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치수라도 이마 모양에 따라 챙이 앉는 각도가 달라진다. 거울 앞에서 각도를 몇 번 바꿔 봐야 살지 말지가 정해지는 물건. 그래서 이 업태는 매장을 못 버린다. 대신 매장 하나가 감당해야 할 판매액이 커진다.

7.들어온 시점이 좋은 해는 아니다. 중국 럭셔리 소비는 2025년에 10~15% 줄었고, 회복 신호가 잡히기 시작한 게 올해 초부터라고 업계는 본다. 다만 모자는 가방이나 시계보다 한 단계 아래 가격대. 소비가 꺾인 시장에서 명품 매장을 나오는 사람이 손에 드는 물건이 그 아래 가격대이고, 400달러대는 그 구간에 정확히 걸린다.

8.가격 상단은 따로 만들었다. 개점에 맞춰 내놓은 한정판이 18캐럿 금 로고에 루비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를 박은 페도라다. 유리 상자에 넣고 황동 조명을 네 방향에서 쏘아 놨다. 값은 비공개. 몇 개나 팔리느냐는 부차적이고, 옆에 놓인 400달러짜리를 싸 보이게 만드는 쪽이 이 한 개를 놓은 이유다.

9.넉 달 팝업이 한 일은 상권 조사다. 아트리움 매대는 몰 임대차가 아니라 행사 공간 사용 계약으로 잡히고, 기간과 철거일이 계약서에 먼저 박힌다. 안 되면 접고 나가면 되는 구조. 되는 걸 확인한 뒤 같은 건물 안에서 상설로 갈아탔다. 매장 자리를 잘못 고를 위험을 넉 달치 사용료로 바꿔 치렀다.
10.직영으로 갈아타는 이유는 마진에 있다. 이 회사의 본체는 도매였고 지금도 거래처가 300곳쯤 된다. 도매는 소매가의 절반 아래로 넘기고 재고 위험을 소매점에 넘기는 대신, 남는 몫이 얇고 물건이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지를 통제하지 못한다. 직영은 반대다. 값을 다 받는 대신 임차료와 인건비, 재고가 전부 자기 몫. 그럼 어느 쪽이 남나.
11.그래서 속도를 스스로 눌렀다. 대중화권에 최대 40곳까지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올해 안 추가 출점은 4곳으로 잡았다. 매니징 디렉터 마우로 발리에토(Mauro Baglietto)는 너무 공격적인 계획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국이 예전보다 규율 있는 접근을 요구하는 시장이라는 게 그가 붙인 이유.
12.이 조심스러움에는 내력이 있다. 2017년 12월 알레산드리아 법원이 회생 계획을 물리면서 이 회사는 파산했다. 상표권은 그해 5월에 이미 투자사 Haeres Equita가 1,800만 유로에 사 갔고, 이듬해 7월 파산 경매에서 공장과 설비, 고용계약까지 640만 유로에 넘어갔다. 브랜드와 공장이 한 번 갈라졌다가 다시 붙은 회사다.

13.모자 한 품목으로 매장을 채우기 어렵다는 것도 회사가 안다. 9월부터 스위스 업체 Gamat과 5년 라이선스를 맺고 가죽 가방과 액세서리를 낸다. 노리는 건 진열 면적과 객단가. 라이선스로 가면 생산 설비를 새로 짓지 않아도 된다. 공장이 만드는 물건은 여전히 모자뿐.

14.시작은 1857년 알레산드리아, 주세페 보르살리노(Giuseppe Borsalino)가 연 공방이었다. 20세기 들어 영화가 이 물건을 팔았다. 화면 속 인물이 쓴 챙 넓은 펠트 모자가 브랜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이름값이 지금 상하이 아트리움에 걸린 흑백 배너의 재료가 된다. 오래된 사진을 그대로 쓸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다.

15.몰 아트리움을 쓴다는 선택도 따로 볼 값이 있다. 정규 매장은 층과 구획이 정해져 있어 좋은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트리움은 몰이 행사용으로 돌리는 공간이라 일정만 맞으면 들어간다. 유동인구는 그 몰에서 가장 많고, 위층에서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자리. 브랜드를 아는 사람을 부르는 자리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 눈에 띄는 자리다.

16.169년 된 모자 회사가 넉 달을 시험 삼아 쓰고 같은 건물에 상설 매장을 열었고, 그 뒤에는 파산 경매에서 640만 유로에 넘어갔던 공장이 있다. 국내에서 같은 순서를 밟으려 할 때 먼저 막히는 건 자리가 아니라 계약 형태다. 백화점과 대형 몰의 행사 공간은 임대차가 아니라 수수료 매장으로 잡힌다. 매출의 일정 비율을 떼는 방식이고, 그 비율이 정규 입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험 비용이 싸지 않으면 시험의 값어치도 줄어들고, 그러면 처음부터 정규 입점을 협상하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