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안경 브랜드 블루엘리펀트가 8월 13일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에 미국 첫 매장을 열었다. 가구 체인이 쓰던 1940년대 건물, 660㎡. 지난해 매출은 69% 늘었고 영업이익은 74% 줄었다. 문을 열기 열흘 전에는 사모펀드와 1,000억 원 투자 계약을 맺었다.
1.블루엘리펀트(Blue Elephant)가 8월 13일 노스 베벌리 드라이브(North Beverly Drive) 300번지에 미국 1호 매장을 열었다. 1940년대에 지은 건물이고, 가구 체인 Pottery Barn이 쓰던 자리. 면적은 660㎡, 200평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 2019년 서울에서 시작한 브랜드가 한국과 일본 다음으로 낸 세 번째 나라의 매장이고, 이 매장까지 합쳐 35곳이 됐다고 코리아헤럴드가 전했다.
2.가격은 서울과 숫자가 같다. 한국에서 4만 9,900원과 6만 9,900원을 받는 테를 여기서는 49.90달러와 69.90달러에 판다. 달러당 1,400원으로 치면 약 7만 원과 9만 8,000원이니, 통화 기호만 바꿔 달았는데 원화로는 40%가 더 붙는다. 이 매장에서만 파는 LA 전용 컬렉션 10종도 같은 두 가격에 묶었다. 캘리포니아 해변과 할리우드 간판, 야자수가 늘어선 베벌리힐스 거리에서 모양을 따왔다고 회사는 설명한다.

3.건물 뼈대는 그대로 뒀다. 나무를 덧댄 활 모양 트러스(bowstring truss)가 천장을 가로지르고, 그 아래 바닥은 광을 낸 콘크리트 한 가지로 끝까지 간다. 1층 한가운데에는 L과 A를 커다랗게 세운 검은 조형물이 진열대를 겸하고, 안쪽으로는 아치를 줄지어 세운 통로가 테를 따라 걷게 만든다. 설계는 바깥 스튜디오 없이 회사가 직접.


4.위층 메자닌은 딴판. 바닥 전체에 붉은 카펫을 깔고, 곡선으로 휜 흰 벽 여러 장을 겹쳐 세웠다. 콘크리트 위에서 울리던 발소리가 계단을 다 오르면 카펫에 묻힌다. 천창으로 든 빛은 붉은 바닥에 네모나게 떨어진다. 벽마다 테 몇 개만 올려 두어서 다음 테를 보려면 벽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5.회사는 도시마다 매장을 다시 짜는 방식을 Space 2.0이라 부른다. 들어가는 도시의 건축과 문화를 읽고 공간을 새로 짓는다는 설명. 도쿄에서는 하라주쿠와 신주쿠 매장이 전시장 같은 구성으로 입소문을 탔다. 베벌리힐스에서는 그 일을 트러스 지붕과 LA 글자가 한다.


6.5만 원짜리 테를 사러 들어온 사람에게 200평은 덤이 아니다. 안경은 얼굴에 쓰고 거울을 보는 물건이라 매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곧 구매 이유가 되고,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은 그대로 광고가 된다. 가격이 낮으면 색이 다른 테를 두세 개 한꺼번에 집기도 쉽다. 싼 물건과 비싼 공간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손님은 이득을 본 기분으로 나간다.
7.회사는 이 매장을 미국 손님에게 맞는 제품을 만드는 기지로 쓰고 문화 행사도 열겠다고 밝혔다. 한국 브랜드가 현지 손님의 얼굴형과 취향을 직접 재 볼 자리를 얻은 것이다. 미국 안경 시장에서 싼 쪽을 잡고 있는 Warby Parker는 처방 렌즈를 넣은 안경을 95달러부터 판다. 블루엘리펀트의 가격표는 그보다 아래.
8.매출은 2022년 10억 원에서 2023년 58억, 2024년 300억, 2025년 507억 원으로 올라왔다. 이익률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24년. 영업이익 128억 원으로 매출의 42.7%를 남겼다. 지난해에는 영업이익이 33억 원으로 74% 줄었고, 이익률은 6.6%로 내려앉았다.
9.빠진 이익은 매장으로 갔다. 판매관리비가 104억에서 350억 원으로 늘었는데, 그 안에서 지급임차료가 12억에서 88억, 인테리어 비용이 40억에서 145억, 광고선전비가 25억에서 53억 원이 됐다. 같은 기간 매장은 2024년 말 14곳에서 27곳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블로터가 전했다. 회사는 해외 진출과 매장 확대, 품질을 올리려는 투자 때문에 이익률이 낮아졌다고 설명한다.
10.재고도 쌓였다. 재고자산이 23억에서 63억 원으로 늘었고 재고회전율은 한 해 5.8회에서 2.8회로 떨어졌다. 모자란 돈은 빚으로 메웠다는 게 딜사이트의 분석. 단기차입금이 28억에서 337억 원이 됐고 지난해 말 부채비율은 307%.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024년 124억 원이 들어왔는데 2025년에는 25억 원이 빠져나갔다.
11.그 장부를 들고 8월 3일 어펄마캐피탈(Affirma Capital)과 1,000억 원 투자 계약을 맺었다. 750억 원을 먼저 넣고 6개월 안에 250억 원을 더 넣을 수 있는 선택권이 붙었으며, 다 넣으면 지분은 최대 25.8%다. 회사가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약 4,000억 원. 부채비율을 60% 밑으로 낮추고 미국과 일본에서 매장과 온라인을 넓히겠다는 게 회사의 계획이다.
12.4,000억 원은 지난해 매출의 7.9배이고, 지난해 영업이익으로 나누면 121배가 나온다. 2024년 영업이익 128억 원에 대면 31배. 투자자가 값을 매긴 기준은 지난해 장부가 아니라 2024년의 이익률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다. 그 기대가 맞으려면 새로 연 매장들이 인테리어 비용을 빨리 갚아야 하고, 그중 가장 비싼 매장이 베벌리힐스.
13.이 매장의 임대료는 얼마일까. 회사는 밝히지 않았다. 노스 베벌리 드라이브의 노면 임대료를 제곱피트당 한 해 100달러에서 150달러로 보면, 660㎡(7,104제곱피트)에 한 해 10억에서 15억 원이 든다(추정). 지난해 회사 전체 임차료 88억 원을 매장 27곳으로 단순히 나누면 한 곳에 3억 원 남짓이라, 이 매장 하나가 평균 매장 서너 곳 몫이다.


14.임대료를 매출의 15% 안에 넣으려면 이 매장은 한 해 67억에서 100억 원을 팔아야 한다. 69.90달러(약 9만 8,000원)짜리 테로 치면 하루 190개에서 280개. 지난해 회사 매출 507억 원을 매장 수로 나눈 평균이 18억 원 남짓이니 평균 매장의 네다섯 배를 팔아야 계산이 선다(추정). 판매처로만 보면 무거운 매장이고, 미국에 이름을 알리는 광고판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5.매장을 전시장처럼 짓는 한국 안경 브랜드의 길은 Gentle Monster가 먼저 냈다. 블루엘리펀트는 그 방식을 5만 원대 테에 붙여 여섯 해 만에 매출 500억 원을 넘겼다. 두 회사는 지금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여부를 두고 민·형사 소송을 벌이고 있고,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걸리는 게 하나 더. 도수 안경을 팔려면 검안사 처방이 필요한데, 베벌리힐스 매장이 도수 렌즈까지 맞춰 주는지는 공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6.영업이익이 4분의 1로 줄어든 이듬해, 블루엘리펀트는 1,000억 원을 받기로 하고 열흘 뒤 베벌리힐스에 200평을 열었다. 이 매장이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하루 200개 넘는 테를 팔아야 한다(추정). 싼 물건을 비싼 공간에서 파는 방식을 국내에서 쓰려 할 때 먼저 부딪히는 건 인테리어 비용이다. 도시마다 새로 짓는 매장은 임대차 기간 안에 공사비를 다 뽑아야 하는데, 매장 수를 늘리는 속도가 그 회수 속도를 앞지르면 지난해 이 회사 장부처럼 매출은 늘고 이익은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