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창열이 30년 넘게 살며 그림을 그린 평창동 집이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문을 연 지 넉 달이 됐다. 지하 작업실은 되살리고, 담장을 허물어 길 쪽으로 마당을 냈다.
1.서울 종로구 평창7길, 북한산으로 오르는 비탈 중간에 낮은 석조 건물 한 채가 소나무 아래 엎드려 있다. 2026년 5월 28일 문을 연 종로구립 김창열 화가의 집. 개관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은 기간을 12월 20일까지 늘렸다.
2.화가가 1984년 건축가 우규승(Kyu Sung Woo)에게 설계를 맡겨 1988년에 완공한 집이다. 우규승은 뒤에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88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 대지는 638㎡, 약 193평이고 콘크리트로 지하 두 층과 지상 두 층을 올렸다. 서울시는 2023년 이 집을 우수건축자산 제13호로 등록했다.
3.종로구는 2020년 9월 유족과 협약을 맺고 2022년 집을 샀다. 공사는 2024년 12월에 시작해 15개월 걸렸고, 설계는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을 설계한 플랫폼아키텍처의 최수연·홍재승이 맡았다. 고친 뒤 연면적은 511.96㎡로, 155평이 조금 넘는다.

4.원래 집은 길보다 1.5m쯤 낮게 앉아 담장 뒤에 숨은 ㄷ자 집이었다. 설계진은 담장을 허물어 길에서 곧장 들어서는 진입 마당을 냈고, ㄷ자의 트인 쪽에 회랑을 붙여 가운데 마당을 ㅁ자로 닫았다. 승강기는 본체에 구멍을 내지 않고 건물 밖에 탑을 따로 세워 넣었다.


5.옆길은 골목처럼 좁다. 양쪽 벽은 표면을 거칠게 남긴 마감이라, 해가 비스듬히 들면 벽 전체에 오톨도톨한 그림자가 선다. 바닥에는 작은 돌을 박은 판이 이어지고, 출입구 모서리에는 빗물을 사슬로 받아 내리는 레인체인을 달았다. 비 오는 날 물이 사슬 고리를 하나씩 타고 내려온다. 물방울 하나로 50년을 그린 화가의 집에 건축가가 붙인 인사.

6.지하 2층은 화가가 쓰던 작업실과 서재를 되살린 방이다. 김창열은 작업실에 빛을 들이지 않는 편이라며 "동굴 같은 곳에서 내면의 빛에 철저하게 의존한다"고 말했다. 지금 그 방에는 천장의 둥근 천창과 벽 위쪽 높은 창으로 걸러진 빛만 떨어진다. 캔버스를 세워 두던 나무 선반과 무쇠 난로도 제자리.


7.매표소와 카페가 2층, 전시실 두 곳이 1층, 아카이브와 수장고가 지하 1층에 있다.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전시장에서 화가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순서. 유족이 넘긴 작품 390점을 포함해 작품과 자료 2,609점이 이 집에 있다.

8.관람 규칙이 이 집의 성격을 말해 준다. 실내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사진 촬영과 음식물 반입이 안 되며, 전시 중에는 전화도 쓰지 말라고 안내한다. 인증 사진이 곧 홍보인 시대에 찍지 못하게 하는 미술관. 여기서 파는 것은 걸린 그림 몇 점보다, 한 화가가 30년 동안 붓을 쥐던 방에 조용히 서 보는 시간에 가깝다.

9.평창동은 가나아트센터와 서울옥션 본사, 토탈미술관이 모인 동네다. 전시를 보러 일부러 비탈을 오르는 사람이 이미 있는 곳에 작은 방문지 하나가 더 붙었다. 주차장은 없고 대중교통으로 오라고 안내한다. 연면적 155평짜리 집이라 한 번에 많이 받을 수도 없다.
10.종로구는 매입가를 공개하지 않았다. 평창동 단독주택 땅값을 3.3㎡당 1,500만~2,000만 원으로 잡으면, 193평 땅만 29억~39억 원이다(추정). 2022년에 산 값이라 지금 시세와 같지는 않다.
11.공사비도 발표되지 않았다. 지하 방수와 석재 마감, 승강기 탑이 들어간 공공 리모델링을 3.3㎡당 700만~900만 원으로 치면 155평에 11억~14억 원. 땅과 공사를 합친 금액은 40억~53억 원쯤 된다(추정).
12.10년 전 제주에서 같은 화가의 미술관을 지을 때는 연면적 1,587㎡를 새로 올리는 데 92억 원이 들었다. ㎡당 약 580만 원. 평창동 집은 새로 짓지 않았는데도 서울 땅값이 얹혀 ㎡당 780만~1,040만 원(추정)이 나온다. 면적은 제주의 3분의 1인데 들어간 돈은 절반 안팎이다.
13.입장료는 성인 5,000원, 청소년 3,000원이고 65세 이상은 무료, 종로구민과 한복 차림은 반값이다. 하루 80명이 1년 300일 오고 한 사람당 평균 3,000원을 낸다고 치면 한 해 입장 수입은 7,200만 원이다(추정). 운영은 종로문화재단이 맡는데, 학예·안내 인력 몇 명의 인건비만으로도 이 금액을 넘긴다. 나머지는 누가 내나. 구 예산이다.
14.종로구가 화가의 집을 미술관으로 바꾼 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옥인동에 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은 화가 박노수가 살던 1930년대 집이다.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은 우규승이 설계해 1992년에 열었으니, 같은 건축가가 한 화가에게는 살 집을, 다른 화가에게는 미술관을 지어 준 뒤 그 집마저 미술관이 된 경우다.
15.제주 미술관은 작품을 보여 주려고 새로 지은 상자였다. 평창동은 거꾸로, 방 자체가 전시물. 그래서 고친 자리도 담장과 마당, 회랑, 승강기처럼 사람을 들이는 곳에 몰렸고, 화가가 일하던 지하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 고친 범위보다 안 고친 범위를 먼저 정한 공사.

16.종로구는 30여 년 된 화가의 집을 사서 15개월 고친 뒤 입장료 5,000원을 받는 미술관으로 열었고, 땅과 공사에 들어간 돈은 40억~53억 원으로 추정된다. 민간이 오래된 단독주택을 이렇게 쓰려 하면 용도변경에서 먼저 막힌다. 주택을 전시시설로 바꾸는 순간 승강기와 피난, 장애인 편의 기준이 따라붙는다. 원형을 건드리지 않고 그 기준을 채우려면 이 집처럼 본체 밖에 승강기 탑을 세울 땅이 남아 있어야 한다. 입장 수입으로 운영비를 못 채우는 구조라, 카페나 대관 수입 없이 민간이 버틸 수 있을까.
